작년부터 서울의 한 대학에서 인권 강의를 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인권' 강좌이기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들이 적지 않다. 인권이 워낙 통섭적이고 학제적인 접근이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국내외의 실천과 이론, 정책을 동시에 다루어야 하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이보다 훨씬 더 곤혹스럽게 하는 점은 바로 요즘의 대학가 풍속도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이미 학문에 등을 돌린 지 오래다. 취업대기소로 전락했다고 하면 지나친 폄하일까. 입시 준비에 매달려 간신히 입학한 대학에서, 또다시 죽기살기식의 취업 준비에 올인해야만 하는 게 오늘날 대학생들의 현실 아닌가. 학생들은 스펙 경쟁에 정작 본연의 사명인 학문을 공부할 틈이 없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강의실은 미어터지지만, 인간 존엄성 따위를 다루는 강의실은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초점 없이 흐릿한 눈초리로 흡사 유체이탈된 것처럼 몸만 앉아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나마 출석을 강제하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일분일초라도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에게 한가롭게(!)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 운운한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와 가치로 다가갈지 자괴감마저 든다. 최근 서점가에서 불티나게 팔렸다는 '정의' 관련 서적들도 정의를 향한 갈급함 때문이 아니라 논술 대비용으로 많이 팔렸다는 얘기까지 들리니 허망하기 짝이 없다. 인권이나 평화, 정의,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고상한 가치들이 고작해야 시험용, 심지어 경쟁 도구로나 쓰이고 있다는 것 아닌가.
세상이 요구하는 당장의 쓰임새만을 생각한다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이란 한낱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질없는 게 어디 인권뿐이랴. 역사학, 철학, 문학 등은 전공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인문학은 당대의 사회공동체의 영혼을 구성한다. 사회공동체의 미래 비전도 인문학적 상상력 없인 제대로 세울 수 없다. 그런데도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규범과 가치가 날로 황폐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학문의 위기, 특히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한 사회공동체의 비판의식 마비와 철학의 실종, 그리고 윤리의 타락을 초래한다.
아무리 부패해도 능력만 있으면 대우받고, 불법·비리·부정·탈법의 백화점을 차려도 출세하면 그걸로 끝인 세태를 이제 초등학생도 '삶의 지혜'로 받아들일 지경이 되었다. 하긴 일찍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까지 했으니, 친일매국이나 독재, 학살, 고문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쫓겨난 독재자가 건국의 아버지로, 친일 매국노가 전쟁영웅으로 되살아나는 건 일도 아니다. 이러다 보니 보수로 분칠한 이 땅의 극우집단들은 요즘 아주 신이 났다. 급기야 민주주의를 특정 이념으로 가두고 이를 국민들에게 강제하겠단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검찰총장 말을 빌리자면 '좌익종북사범으로 척결하겠다'는 것이다. 사상검증을 내세워 국민을 겁박하고 행세를 강화하겠다는 속셈이다. 인간의 신념과 양심을 편을 갈라 처벌하겠다는 것도 가관이지만, 이런 이들이 자유민주주의 운위하는 꼴이란 더욱 가소롭다. 이들에겐 자유민주주의가 고작 반공파시즘쯤으로나 여겨지는 모양이다. 게다가 좌익사범 신고하라고 지하철 안내방송까지 하면서 우익사범은 거론조차 안 하는 것을 보면, 이 땅에선 우익사범은 범죄자도 아니라는 얘기 아닌가. 그래서일까? 노르웨이의 극우 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유독 한국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호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 무슨 괴기스럽고 수치스러운 광경인가. 이러다 정말 대한민국이 세계 극우테러집단의 막장으로나 전락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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