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교토로 오면 만날 수는 있지만, 1시간 이상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 지난 17일 일본 오사카부 구마토리초의 교토대 원자로실험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몸이 열개쯤 됐으면 좋겠다. 1분1초도 쪼개 쓸 수밖에 없다"며 거듭 미안해했다.
고이데 히로아키(63·사진) 교토대 원자로실험소 조교는 지난 3월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유출사고 이후 일본에서 가장 바쁜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는 "내년 3월 말까지는 이미 주말 강연 일정이 가득 찼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그의 강연을 듣기 바라는 한 누리꾼이 만든 '고이데 히로아키 강연회 정보' 사이트를 보면 그의 최근 강연 일정을 볼 수 있다. 8월4일 도쿄, 5일엔 후쿠시마와 센다이, 13일엔 오키나와, 20일 히로시마, 27일엔 다시 도쿄. 평일엔 방사능 측정이란 주 업무를 하고, 후쿠시마 상황에 대해 논문을 쓰고, 언론 인터뷰에도 응한다. 그를 찾는 이가 많은 것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관련해 지금 그가 일본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학자인 까닭이다.
"애초 나도 원자력 개발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생각했지요."
그가 고등학생이던 1966년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에 도카이 1호기가 가동을 시작하면서 일본에도 원자력시대가 열렸다. 온갖 매스컴이 이 '꿈의 에너지'를 찬양했다. 그도 꿈에 부풀어 미야기현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대 원자핵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원자력을 공부하면서 그는 그 허상에 점차 눈을 뜨게 된다.
센다이에서 쓸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짓는데, 왜 큰 전력소모를 감수하고 직선거리로 60㎞나 떨어진 오나가와에 짓는다는 것인가? 원전은 도시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 그는 1970년 오나가와 원전 반대운동에 참가하면서 '반원전의 길'로 걸어들어갔다. 대학원을 마친 뒤 그는 "원자력 연구의 장에서 '반원전'을 위해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1974년 교토대 원자로실험소에서 조교로 일을 시작했다. 방사선 계측, 원자력안전이 그의 전공이다.
37년의 경력,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그의 직책은 지금도 '조교'다. 일본 대학의 조교는 교수, 준교수 밑의 교수요원이다. 한국 대학의 '조교수'와 비슷하다. 그는 "자유로운 연구와 내 생각을 지키기 위해, 조교 이상의 직위로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며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되는 이 직책이 나는 좋다"고 말했다.
그는 원자력 전문가로서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강연을 해왔다. '원자력과 관련해, 내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는 일'을 그는 주로 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뒤, 일본에 도달한 방사능에 대해 체계적인 계측을 하고, 연구보고서를 쓴 것도 그였다. 그해 가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체르노빌 관련 국제회의에도 일본 연구자를 대표해 참석했다.
"지위, 명예, 돈이 좋다고 생각하면 못 하겠지만, 그것에 매달리지만 않는다면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원전 반대에 생애를 몽땅 걸어온 이 원자력 과학자는 아주 쉽게 대답했다. 물론 그 또한 "내가 대학, 그것도 교원 각자의 특성을 존중해주는 교토대에 있었으니 (반원전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의 연구실 벽엔 다나카 쇼조(1841~1913)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면서 무기를 만들기 위해 도치기현에서 광산 개발을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오염이 심각하게 퍼졌다. 농작물이 말라죽고 사람이 죽어나갔다. 제국의회 의원이었던 다나카는 농민의 편에 서서 싸우다 모욕죄로 투옥됐다. 그는 풀려난 뒤 의원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끝까지 농민 편에 서서 싸웠다.
"국가가 인민을 죽이는 게 말이 되느냐고 다나카 쇼조는 싸웠지만, 그의 주장은 정치의 장에서는 살아남지 못했지요."
어쩌면 고이데 조교를 비롯한 일본 반원전 학자·운동가들의 오랜 싸움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나타났다. 고이데가 1991년에 낸 란 책은 올해 들어 수만부가 팔렸지만, 당시엔 2000~3000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주류 언론은 지금도 고이데 같은 '반원전 학자'에게는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뒤 그의 판단과 예측대로 사태가 전개되면서야 일부 매체가 그를 인터뷰한 정도다.
그는 "후쿠시마 1호기는 원자로 압력용기는 물론, 격납용기 바닥에도 구멍이 뚫려 핵연료가 지하로 스며들고 있을 것"이라며 "원전 전체를 거대한 무덤으로 삼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 핵무덤을 수만년 이상 인류가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느냐는 또다른 문제다. 그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나처럼 원전 사고를 경고해온 사람도 그러는데, 원전 사고는 있을 수 없다고 믿어온 사람들은 이 현실이 믿어지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래도 1970년대 일본의 옛 7개 제국대학에 모두 있던 원자력공학과가 지금은 다 없어진 것에서 보듯 원자력을 보는 대중의 시각은 많이 변해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탈원전' 여론은 70%에 이른다. 고이데는 "많은 이들이 그만큼 느끼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그런 뒤에도 남는 게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지도를 받으면 취직을 못 하게 될까봐 지도를 해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해왔다는 그는 "끝없이 의심하는 일에 충실하는 게 과학이고, 과학자의 자세"라고 말했다.
오사카/글·사진 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