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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daum.net | Nov 30th -0001
모든 것에는 각자의 영역이 있다. A와 카테고리가 다른 B를 A의 기준으로 재단해봤자 헛수고일 뿐이다. 그러나 조규찬은 해냈다. 찌질 모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조규찬은 'C.F'에서 사랑의 감정을 수학적 통계로 재단하려는 모험을 감행한다. 많이 본 횟수로 사랑에 빠지면 나는 동네 슈퍼 아주머니랑 연애해야 하나? 감정은 기간과 횟수에 대체로 비례할 수는 있지만 절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인생의 진리, 조규찬이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결국 그 숭고한 절박함은 사랑의 감정마저 통계로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창조해내지....는 못했으나 이렇게 보란 듯이 이 글의 10위를 성취했다.
찌질-펀치라인=> '내가 널 다섯 번 볼 동안 너의 남자친구는 아마 겨우 한두 번쯤 만나는 게 고작일 테고'
언뜻 보면 한없이 아름다운 가사다. 꿈속으로 찾아가 얘기를 듣고 오겠다니, 이 얼마나 애틋한가. 요즘 가요계에 이런 가사가 나올 수만 있다면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 각오도 되어 있다. 하지만 스토커는 스토커다. 그것도 현실을 뛰어넘어 상대의 무의식 세계까지 침범하려고 하는 악질 스토커 말이다. 더군다나 꿈속은 복습교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정상인은 현실에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다시 꿈으로까지 꾸지 않는다. 설마 이렇게 말하는 나. 내 안의 낭만은 죽은 건가? 여담이지만 '그렇다면' 혹은 '그러면'이 아닌 '허면'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화자가 서울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해볼 수 있겠다.
찌질-펀치라인=> '나 그대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 싶지만 어쩐지 그대 내게 말을 안 해요 허면 그대 잠든 밤 꿈속으로 찾아가 살며시 얘기 듣고 올래요'
이제는 나스(Nas)의 [Illmatic]이 발매되었던 해가 아닌 카라의 강지영이 태어났던 해로 역사에 기록될 1994년에는 임종환도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이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라 조심스럽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히트곡의 재기를 다시 음미하는 일이 그에 대한 무례는 아닐 것이다.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전화를 걸었는지 길을 걸었는지에 대해 언쟁을 할 필요는 없다.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기 때문이다. 이 절묘한 중의법은 황희 정승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절묘하다고 해서 찌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냥 걸었다고 했다가, 너의 집 앞이라고 했다가, 나 그냥 갈까 워우워우워우워 하는 그의 모습은 세상의 가장 초라한 존재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는 당시 이 노래를 들으며 그를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언젠가 이 수법을 꼭 써먹으리라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써먹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놈의 '오빠믿지' 어플..OTL
찌질-펀치라인=> '나 그냥 갈까 워우워우워우워'
물론 아무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석원의 작사 실력을 절대 얕보아서는 안 된다. 015B의 많은 노래를 비롯해 박정현의 '미장원에서' 등에서 볼 수 있듯 그는 훌륭한 프로듀서인 동시에 뛰어난 작사가였다. 정석원은 이 곡에서도 입대를 앞둔 남자의 보편적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해낸다. 덕분에 이 곡에서 이장우는 준-츤데레로 분한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끌려가야하는 나를 여자친구가 당연히 기다려주길 원하지만 일단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계속 가식모드로 갔다면 츤데레가 완성되었겠지만 마지막에 결국 속내를 드러냈기 때문에 완성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가슴팍에 강렬하게 와닿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갑자기 울적해진다. 입대할 때 나는 그녀에게 대놓고 내가 지금껏 참아주고 받아주고 잘해주었으니 이제 네가 기다릴 차례라고 했다. 하지만 작대기 두 개를 달 즈음 부대 안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는 쫄병 주제에 부대가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그녀는 올해 가을 결혼했다.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찌질-펀치라인=> '날 기다리진 마 네게 부담주긴 싫어 좋은 사람 만날 기회를 나 때문에 피하지는 마 하지만 그래도 니가 나를 못 잊어 아무 것도 없이 새로 시작할 날 허락한다면 그땐 너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해당 음원은 온라인 서비스 불가한 음원인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6위. 한경훈(빛과소금)이 패배자를 자처하며 동정심 유발 작전을 폈던 순간: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1991)
일단 이 곡은 한경훈이 불렀기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장기호가 불렀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장기호의 스타일리쉬한 보컬로는 패배자가 될 수 없다. 한경훈처럼 음정도 조금씩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곳곳의 기교는 이게 가녹음 버전이 아닌지 의심하게 하며 무엇보다 사랑에 처음 데인 대학 초년생 느낌이 있어야 한다. 한경훈은 이 곡에서 그걸 해내고 있다. 또한 보통 이별노래에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봐'같은 가사는 잘 쓰이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나 '나는 너 없인 이제 견딜 수 없어'같은 보다 직선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한경훈은 이별 후 브레인스토밍의 시작을 굳이 중얼거리며 알린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이 자조적인 혼잣말은 그래서 더 애처롭다. 패배자 한경훈의 동정심 유발 작전은 성공으로 귀결되었다.
찌질-펀치라인=>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봐'
이 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윤종신이 인터뷰에서 '지하 5층 깊이 찌질함'으로 인정한 노래 되겠다. 사실 이 곡에서 특별히 강렬하게 찌질한 구절은 없다. 하지만 이 곡은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눈으로 보아야 비로소 찌질함을 발견할 수 있다. 유별나게도 제목에 찌질함이 서려 있는 것이다. 5월12일이 대체 무슨 날인가? 015B의 결성일인가? 아니면 정석원의 생일인가? 아니다. 모두 틀렸다. 그런 식상한 예측은 모두 치워라. 5월12일은 바로 정석원이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다. 이 곡과 관련해 정석원이 직접 쓴 글에서도 알 수 있듯 정석원은 1987년 5월12일 이화여대에 다니는 한 여성과 처음 만나 2년 반 동안 교제를 하다 그녀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다. '그녀의 딸은 세 살이에요'를 비롯한 015B의 다른 이별 노래들도 거의 그녀에 관한 곡이라고 한다. 아무튼 제목만 보고는 물론 노래를 들어봐도 정확히 무슨 날인지 알 수가 없는 자기 혼자만 아는 날짜를 노래 제목으로 한 것 자체가 참 찌질하다. 나랑 상관도 없는 이 날을 매년 기념하는 내가 더 찌질하지만.
찌질-펀치라인=> 제목
4위. 박용준(더클래식)이 인간의 기본 예의에 이의를 제기했던 순간: '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 (1996)
당황스럽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도덕이 흔들렸던 순간이기도 하다. 박용준씨에게 묻는다. 내가 진짜 당신 팬이다. 아 이건 아니고. 박용준씨는 그럼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잘해주지 않고 어떻게 대하나? 얼굴 붉히고, 만난 지 3초 만에 말 놓고, 앉으라고 한 다음 뒤에서 의자 빼고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잘해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기본 예의다. 그녀는 도덕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또 부모님의 가르침처럼 처음 만난 당신을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무엇이 잘못된 건가? 그녀는 당신에게도 그랬고 다른 사람에게도 언제나 그랬다. 앞으로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그렇게 대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 예의, 망각하지 말자. 하, 그런데 왜 눈물이..
찌질-펀치라인=> '처음부터 왜 잘해주었나요 다른 사람에게도 언제나 그런가요'
아마 토이의 이름으로 발표한 모든 곡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한 방이 아닐까? 전형적이지만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심금을 울리는 노래다. 김연우의 보컬이 최강 포스를 발휘한 곡이기도 하다. 일단 이 곡은 헤어진 여자친구는 물론 앞마당의 바둑이마저 귀 기울이지 않는 독백 류 카테고리에 속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기본 찌질력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 곡은 한문 숙제하는 순간에 절정으로 치닫는다. 왜 그녀의 이름으로 한문 숙제를 하나? 그녀의 이름이 한문 시험에 나오기라도 했나?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두지만 빈 종이에 가득 써야할 건 영단어 혹은 고사성어 뿐이다. 혹시라도 숙제하다 모르는 한자 물어보려고 그녀에게 전화 걸었던 것이라면 이 글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다.
찌질-펀치라인=> '하지만 말야 빈 종이에 가득 너의 이름 쓰면서 네게 전화 걸어 너의 음성 들을 땐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
2위. 오태호가 놓친 컵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던 순간: '친구 수첩 속의 너의 사진' (1993)
순위에 오른 노래 중 유일하게 찌질-펀치라인이 의성어다. 나도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찌질했다는 뜻도 되겠다. 오태호는 말 한마디 없이 효과음으로 제압한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이 노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친구가 지갑을 꺼냈는데 그 속에 예전 여자친구 사진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고 그만 잡고 있던 컵을 놓쳐 깨뜨리고 말았다는, 뭐 그런 스토리를 담고 있다. 여기까지는 솔직히 보기에 따라 안 찌질하거나 덜 찌질해 순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오태호가 찌질함의 문턱을 끝내 넘을 수 있었던 까닭은 컵이 깨지는 소리를 곡의 도입부에 효과음으로 삽입할 생각을 했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화들짝 놀라곤 한다.
찌질-펀치라인=> 쨍그랑(의성어)
사실 이 글을 기획한 순간부터 이미 1위는 정해져 있었다. 본격 나 자신과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대 윤종신만으로 1위부터 10위까지를 모두 채울 수도 있었다. 윤종신의 앨범을 늘어놓고 눈감고 아무 곡이나 골라잡아도 순위권이라는 작금의 현실이 황당하다. 그래서 고심 또 고심했다. 몇 가지 키워드를 추려냈다. 미안할 일 아닌데 미안하다고 하기('오늘', '잘했어요' 등), 그녀를 잊으려 괜스레 생돈 들여 이사 가기('도피' 등), 같이 갔던 곳 혼자 다시 가기('모처럼', '바다이야기' 등) 등등이 있었지만 역시 '안 물어봤는데 말하기'를 당해낼 곡은 없었다. 그래, 뭐 가사의 한 두 줄 정도는 안 물어본 말도 늘어놓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이건 뭐, 곡 전체가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말이고 동시에 누구도 듣고 있지 않은 말들이다. 이봐,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을 궁금해 하지 않아. 담배를 끊었는지 못 끊었는지, 친구 중 한 명이 부자가 되었는지 쫄딱 망했는지, 당신이 이사를 갔는지 안 갔는지, 절대, 전혀, 아무 것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고. 크게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보편적인 찌질 수준이라고 치자. 그런데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는 법. 이 곡 역시 1위를 차지할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부질없이 내 소식 말하는 걸 처량한 후횐 줄 오해 말아 누구나 한번쯤 돌아보는 세월 그 중에 너를 빼놓을 수 없어서'라니. 너 지금 후회하고 있잖아. 그것도 엄청나게 처량한 모습으로. 그리고 정말 절망적이지만 이것도 안 물어본 거야 OTL. 그녀는 그녀가 안 물어본 것들을 당신이 굳이 늘어놓는 이유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않았다구! 하..어떤가. 1위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음악왕은 사실 찌질왕이었다.
찌질-펀치라인=> '부질없이 내 소식 말하는 걸 처량한 후횐 줄 오해 말아 누구나 한번쯤 돌아보는 세월 그중에 너를 빼놓을 수 없어서'
(글: 김봉현 대중음악 평론가) 해당 컨텐츠 관련 아티스트들 100비트 | 김봉현 (100비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평론가이자 문화기획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흑인음악을 정체성으로 여기고 90년대 맑은 가요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 우리시대의 클래식]이 있고, 역서로 [제이지 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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