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아버지의 빈소를 지키는 김정은 북한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모습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조문(弔問)정치'에 나섰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상시켰다.
북한 조선중앙TV가 21일 공개한 동영상에서 김정은은 검은 인민복을 입고 '장의위원 서열 1위' 자격으로 가장 앞쪽에 서 있었다. 붉은색의 '김정일화(花)'와 하얀 국화에 뒤덮인 유리관 주변에 늘어선 조문객들은 참배를 마치고 김정은 앞에 이르자 90도로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17년 전 김일성의 빈소에 인민복을 입고 나타나 외교 사절의 조문을 받으며 '지도자'의 지위를 과시한 김정일처럼 김정은 역시 통역을 대동하고 평양 주재 외교관과 국제기구 대표들을 맞이했다.
서열 2위인 김영남(86)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최영림(81) 내각총리가 김정은의 왼쪽에 서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동안, 김정은은 몸을 곧게 세우고 조문객들과 악수를 나눴다. 백발의 조문객이 자신의 손을 잡은 채 오열하자 어깨를 두드려주며 오히려 상대를 위로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정복을 차려입은 군(軍) 인사가 벗어든 군모를 옆에 끼고 김정은에게 절을 하기 위해 줄을 선 모습도 TV화면에 비쳤다. 김정은의 조문 접견이 사실상 '충성서약'을 받는 자리란 점을 입증하듯, 거수경례를 하는 군부 인사도 보였다.
조선중앙TV에 이어 22일엔 노동신문이 1면 사설을 통해 '김정은 시대'의 밑그림을 공개했다. 이날 노동신문은 사설을 '선군(先軍)'과 '강성국가'란 단어로 도배했다. 선군이 21차례, 강성국가가 11차례, '강성'이 19차례 등장했다.
노동신문이 선군을 강조한 것은 일종의 유훈(遺勳) 통치를 시사했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장군님(김정일)의 유훈'을 이어받아 김정은 시대에도 군을 앞장세우는 선군정치 노선을 계속 걷겠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통일연구원의 정영태 선임연구위원은 "세습 체제가 기존의 체제와 크게 달라질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김정일이 생전에 김정은 체제 출범을 위한 기반을 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김정은은 거기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일성 출생 100주년이 되는 내년(2012년)에 '강성대국 진입'을 자축하는 잔치를 열겠다는 계획도 이런 유훈 통치의 일환으로 계속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신문은 사설을 통해 "장군님(김정일)의 강성국가 건설 염원을 끝까지 실현하는 데 우리의 숭고한 도덕 의리가 있다"며 "장군님의 유훈을 틀어쥐고 이 땅, 이 하늘 아래 반드시 세계가 우러러보는 주체의 강성국가를 일떠(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일 사망으로 강성대국 행사를 예정대로 치르지 못할 것이란 예측이 있었으나, 국상(國喪) 중에도 김정일이 입안한 방향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표명해 이런 예측을 뒤엎은 셈이다.
이용수 기자 hejsue@chosun.com
김진명 기자 geumbor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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