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0

종편, 대의 저널리즘의 관 짜기

종합편성채널(종편) 개국으로 저널리즘과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다. 종편이 진실의 저널리즘을 저해하고 민주주의 진화를 방해할 거라는 우려다. 이를 뒤집으면, '조·중·동 연합방송'이 없다면 저널리즘 실천이 여전히 가능하고 민주주의 실현도 기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포착된다. 타당한 기대인가? 이런 가설은 오래됐다. 미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갠즈는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의 관계를 깊이 고민했다. (1)에서, 그는 진실한 저널리즘 처방을 통한 시민 민주주의의 실현을 이상으로 꼽는다.

종편 없으면 저널리즘 실천되나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해 미국 위스콘신 주청사 점거를 시작으로 올해 월가를 비롯한 600개 이상 도시·공간 점거로 이어지는 이른바 '99%의 저항'은, 미국이 민주제와 거리 먼 귀족제, 즉 소수 초국적 금융자본의 과점제임을 증명한다. 이를 구조적으로 지지하는 저널리즘의 해악성을 폭로한다. 과점제 모순의 정확한 노출이자 민주주의 구현에 실패한 제도 저널리즘의 해독성에 대한 고발의 몸짓인 셈이다. 시민들의 생존적 대의(大義)를 위한 불복종 투쟁이자, 자본을 대의하는 주류 저널리즘에 반역한 직접적 언론 활동이었다.

요컨대 갠즈가 희망하는 시민 민주주의는 주류 저널리즘의 독성을 정확히 인식할 때, 그러면서 주류 저널리즘과 (시민) 저널리즘 사이의 상관성에 관한 가설을 과감하게 포기할 때 오히려 가능했다. 주류 매체와 대의정치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축적되고, 그것이 거리 표출과 광장 회집의 형태로 폭발할 때 바로 그 시점과 장소에서 상황적으로 구성되는 게 다름 아닌 시민 민주주의였다. 자본에 대한 거리점거로서의 시민 민주주의는 대의 저널리즘을 통한 게 아니라 그 외부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을 통해 빚어낸 현실이었다.

시민은 주류 언론에 분노한다

주류 저널리즘이 투약하는 '민주주의'의 환각제를 끊어낼 때, 과점제가 초래한 처참이 집단 회집과 공의를 통해 집약될 때, 그때 바로 민주적 상황이 실현된 것이다. 이렇듯 근래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두드러진 시민들의 집단행동, 직접정치는 (주류) 저널리즘과 (시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에 관한 갠즈의 가설, 20세기식 저널리즘과 정치의 연관성에 관한 전통적 가설을 근본에서부터 해체한다. 21세기 (시민) 민주주의 진보 정치의 가능성은 거꾸로 (주류) 저널리즘으로부터 해방 여부에 달려 있음을 확인해준다.

신문과 방송, 혹은 인터넷 매체를 중심으로 한 직업적·전문적 기능체로서 주류 저널리스트들이 제대로 기능할 때, 그때 시민 명령의 민주주의가 가능해질 거라는 기대를 이상 아니 환상으로 밀어내버리는 것이다. 블로그와 아이폰, 캠코더를 갖춘 시민이 저널리스트가 된다. 그래서 접근을 꺼리거나 경찰에 의해 접근이 차단된 기자들을 대신해 직접 저널리즘을 실행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매체를 활용한다. 자본의 과점에 대항하는 시민 민주주의는,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시민 저널리즘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근대가 낳은 저널리즘, 특권이 되다

이게 바로 월가 점거의 상징적 사건 현장에서 재확인하는, 민주주의와 저널리즘 사이의 새로운 관계다. (시민) 민주주의는 주류 저널리즘 외부에서, 시민 저널리스트들에 의한, 직접적인 저널리즘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다. 민주주의 이후의 재민주화를 고민하는 결정적 시간에, 연구실 바깥 대중 저항의 현장에서 희망적으로 발견되는 포스트저널리즘의 핵심이다. 포스트저널리즘은 갠즈의 통념, 즉 주류의 선한 저널리스트들에 의한 (시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관념적 이상을 뒤엎는 일종의 전복적 사건이다.

진보의 내용이자 목표로서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시민) 민주주의는 더 이상 (주류) 저널리즘의 대의제에 주권을 위임하지 않고 시민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실현된다. 주류 저널리스트 대리 역에 대한 기대를 과감하게 철회하는 곳에서 시민·저널리스트에 의해 주체적으로 구성되는 게 민주정치, 즉 시민 민주주의다.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고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는 시민의 집단적 저널리스트 되기, 바로 그 '행함'(Doing)을 통해 민주주의 이후의 재민주화가 가능해진다.

근대는 민족·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대중 저널리즘, 시민 저널리스트의 성장을 수반했다. 서구에서 저널리즘은 원래 주변의 일상적 대중 현상에 관한, 소요하고 사유하는 시민이라는 광의의 집단 주체에 의한 매우 사적인 일기쓰기이자 공적인 의사 표현의 활동과 다름없었다. 공사의 구별은 그렇게 불분명한 것이었다. 의사 발언의 시대적 욕망, 집단적 욕구는 인쇄 기술의 개발과 신문 매체의 발전과 맞아떨어지면서, 계몽된 시민을 저널리스트로 탄생시켰다. 서구 근대성과 시민 저널리즘은 밀접하게 결부된 현상이었다.

이후 저널리즘은 점차 사적이지 않은 공적 활동으로 변모하고, 개인적 실천이 아닌 제도적 활동으로서 체계화된다. 저널리스트는 더 이상 시민 일반이 아닌, 특수하게 훈련된 직업군이자 특별한 자격을 갖춘 전문가로 변신한다. 국가가 선거와 의회라는 대의제를 통해 민주·정치의 시민적 주권을 결정적으로 위임받듯이, 신문과 방송은 저널리즘을 시민의 사적인 표현·발언 활동이 아닌 공적인 사실 정리 작업으로 획정한다. 저널리즘에 정치 비판의 특별한 역할이 부여되고, 저널리스트에게는 권력 감시의 특권적 위상이 주어진다.

시민은 반대로 저널리즘이라는 일상적 실천에서 분리된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참여를 유발하는 언론의 주권조차 신문과 이후의 방송 매체에 일방적으로 귀속시킨다. 시민은 결국 주류 저널리스트들이 생산하는 뉴스와 정보, 지식과 신화의 단순 소비자나 독자, 이용자로 전락하며, 이는 시민을 '정치적인 것'에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론장 폐쇄는 시민이 언론과 표현의 자기 결정력을 상실할 때, 바로 그때 이미 구조화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심화에 따른 부작용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문제다.

SNS로 짜인 기민한 잡언의 네트워크

특수한 자격으로 나선 저널리스트들이 자신에게 위임된 사회 매개의 기능을, 갠즈가 말하는 생산 과정에서의 구조적 한계나 정치·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외부 통제적 요인 때문에 포기해버림으로써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저널리즘은 더 이상 권력 감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권력에 편승하고, 권력의 일부가 된다. 저널리즘 공론장의 폐쇄 현상이 강화되고, 그와 함께 (시민)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욱 심화된다. 권력 견제와 여론 매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저널리스트들이 (시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이 되는 순간이다.

'제4부'의 기대는 20세기를 거치면서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저널리즘의 제도화는 오히려 공화제의 위기를 초래하고, 스스로 권력화하고, 그래서 보수화한 주류 저널리스트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소가 된다. 종편 한참 이전의 일이다. 포스트저널리즘은 바로 이 모순의 임계점에서 폭발적으로 발현한 대항 현실이다. 반민주적 신자유주의의 최고점에서, 근대적 가치이자 제도로서 주류 저널리즘에 위임했던 주권의 회복과 함께 시작된 정치적 현상이다. '프리저널리즘'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시민·저널리스트의 (재)출현 사태이며, 전 지구적 자본의 기술발전이 가능케 한 후기 모더니티의 보편 현실이기도 하다.

자본 권력이 시민 다중의 여론으로부터 동떨어져버리고 국가를 통한 (저널리즘을 포함한) 대의정치가 무력화된 시대에, 자본이 개발한 네트워크 기술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착취하고 권력이 창출한 대중교통(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집단으로 탈취함으로써, 시민들은 다시 저널리즘의 주체로 변신한다. 주도적으로 언론 활동에 나선다. 대의 저널리즘의 시기를 종식하고, 직접 저널리즘이 시간을 개시한다. 바로 이게 지금 당장 전 지구적 포스트민주주의 정치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는 진보적 포스트저널리즘 실천의 양상이다.

월가 점거나 중동에서의 민주화 흐름에 앞서, 포스트저널리즘의 양태는 한국에서 훨씬 일찍 두드러진다. 자본이 주도하고 국가가 지원한 뉴미디어 난개발과 정보기술(IT)의 발전 상태에서, 이명박 정권에 의한 주류 매체와 제도 저널리즘의 철저한 단속은, 역설적이게도 자본·국가 권력에 반한 시민 대중들의 미디어 기술 전유와 저널리즘 재사회화 사태를 혁명적으로 촉발한다. 뉴미디어 기술의 대중교통적 가치를 발굴·착취하면서, 시민들은 포스트저널리즘적 실천을 통해 사회 재민주화의 진보정치를 직접 주도한다. 종편과 상관없는 일이다.

포스트저널리즘은 자유무역의 자유라는, 마르크스가 최종의 자유로 규정한 후기 자본주의의 대세조차 거스른다. 재벌과 초국적 자본이 결정하고 국가가 집행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대의제의 한계마저 여지없이 드러냈다. 민주주의는 한국에서도 자본 과점제의 형식적 포장에 불과하고, 의회는 자본권력의 붕당에 해당하며, 주류 저널리즘은 바로 그 핵심을 지지하는 환상적 포장과 다름없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주류 저널리즘은 명백히 사회 공통의 이익을 위반하는, 진실 판별의 시민주권과 민주정치를 방해하는 독약일 따름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의 실패가 노정되는 순간에, 진실 교환을 향한 시민 저널리즘 활동이 재차 융기한다. 시민 저널리스트들이 다시 떼로 출현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교차하면서 이들은 강력한 대중교통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개인적 권리로서 시민권과 집합적 실천으로서 시민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면서, 민주적 정치체와 진실의 공론장에 대한 권리를 실제적으로 집행한다. 민주주의의 위협 앞에서, '배제된 이들의 말과 사고 및 표현 양식'을 통해, 정치적인 것을 재생시키면서 대중들이 정치적 시민으로 출현한다.(2)

포스트 저널리즘의 출현

이들에게는 블로그와 트위터, 페이스북이 지배적 매체다. 잡다한 글쓰기로써 이음(異音)의 정치를 행하는 시민 저널리스트들은 그리하여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의 근대적 틀을 훌쩍 넘어선다. 롤랑 바르트의 말대로라면, 프로페셔널 저널리즘-작가의 죽음을 아마추어 저널리스트-글쓴이들의 탄생으로 대체한다. 검열과 통제망으로 단속하기 힘든 기민한 잡언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감정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정치 네트워크를 결성한다. 소수 동체를 제외한 (혹은 그로부터 구조적으로 배제된) 다수 공통체들의 적대와 저항, 반란이 바로 이 저널리즘의 재사회화를 통해 시민 민주주의로 실현된다.

주류 저널리스트들에게 더 이상 공론(장) 형성의 역할이 독점적으로 부여되지 않는다. 제도 저널리즘에 부여되던 공론 매개의 특임은 삭제된다. 민주주의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공공영역 확대의 과정으로 볼 때,(3) 거리에 회집한 99%의 저널리스트들이 시민 민주주의의 유효한 약이다. 이 회복기에 주류 저널리즘의 선택지는 별로 없다. 방해자와 구경꾼, 혹은 가담자의 역만 남는다. 주류 저널리스트에 대한 갠즈의 이상은 퇴행적 향수일 뿐, 이를 인식 못할 정도로 '자뻑'의 병이 깊다는 게 비극이다. 종편과 무관한 일이다.

글 /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소장.

(1) 원래 제목은 이었는데, 남재일이 2007년 이 제목으로 옮겼다.

(2)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역), , 후마니타스, 175쪽, 2011.

(3) 자크 랑시에르, 허경(역), , 인간사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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