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피난처마저 폭풍에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11월 23일 투자자들은 독일 국채마저 외면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금융시장은 긴축만 강요하다 불황이라는 자기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유로존 정상회의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타개할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로렐과 하디(코미디언)가 서로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지는 모습은 보고 또 봐도 재밌다. 지겨울 법도 한데 말이다. 유로존 정상회의는 어떤가?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유럽연합(EU)의 가상한 의도는 안타깝게도 판단 오류 탓에 반복적인 코미디로 전락하고 있다. 충격에 빠진 유럽의 지도자들이 내놓는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매번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유로존을 옥죄는 온갖 압박(금융위기 이후 경기후퇴의 엄청난 충격, 각국의 경제정책을 항시적으로 감시하는 금융시장, 소심한 유럽중앙은행(ECB), 자신만의 정책을 고집하는 독일 정부, 통합적 주권 부재)을 고려할 때 유로화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 변명거리가 될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유럽의 상황을 로렐과 하디의 코미디로 전부 설명할 수 없다면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상기해볼 수도 있다.
모든 현실과 괴리된 독단적인 찬반 논쟁이 지배하는 현재의 유럽을 이보다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듯하다. 지금까지 기껏해야 5차례 열린 유로존 정상회의(1)는 아우구스티누스식으로 말해, 여전히 그들이 잘못된 판단을 고수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마침내 유로존을 구할 수 있는 글로벌한(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떠벌렸다가 뒤늦게 말을 번복하는 그들을 보면서 똑같은 코미디를 반복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주의력이 산만한 대중의 관심을 끌려면 갈수록 강한 자극을 주는 볼거리가 필요한 법이다(새로운 기구 창설, 새로운 구제 대상 국가, 새로운 자금원, 갈수록 불어나는 구제금융 등). 그러나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게, 지난 10월 27일 열린 유로존 정상회의가 훌륭하다고 자찬한(여전히 포괄적인) 해결책이 채 일주일도 안 돼 그리스의 국민투표 선언으로 거의 백지화됨으로써 최단 기록을 경신했기 때문이다.
냉탕·온탕 오가는 치명적 결정
이것이 현재의 위기가 1930년대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각 정부는 겉으로 보기에 모순적인 이중의 대응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임기응변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임기응변은 신자유주의 어젠다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이 모순은 왜 유로존 정상회의가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는지, 놀라운 탄력성을 보이는 신자유주의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위기를 역사적 대전환의 기회로 이용하는지를 설명한다. '완전한 침체'와 '급작스러운 폭발'이라는 이중의 양상으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관성과 비일관성은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한다.
현 위기의 발단이 주택담보대출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미국의 모기지 사태는 무한한 임금 압박 속에서 수요를 늘리기 위해 과도한 가계 부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완벽히 재현했다. 그 뒤 민간 금융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경기침체가 뒤따르자 각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금융사 구제에 나서야 했다. 금융인들은 민간금융 위기가 공공재정 위기로 전환되는 것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소집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영국 런던, 미국 피츠버그)는 '스톱앤드고'(Stop and Go·긴축과 확대를 단기간에 반복하는 경제운영 방식) 정책으로 일관했다. 2008년 가을 세계경제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만 해도 공포에 떨던 정치 지도자들과 논평가들은 성급하게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위기는 이제 끝났다"며 승리를 선언하는 공식 발표와 금융 규제 약속(2011년 금융 시스템의 총체적 위기 앞에 유명무실해졌다)을 도발적 언사를 즐기는 악취미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저 어리석음의 소산으로 치부해야 할까. 그들이 주장한 경기회복은 1년이 채 안 돼 주춤거렸고, 그리스 공공재정의 실상이 드러나자 역사상 전례 없는 최악의 경제정책이 다시 도입됐다. 각 정부가 과거, 특히 대공황 시대의 오류에서 교훈을 얻었으리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시장의 비상식적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대신 재정 적자를 어느 정도 용인함으로써 경제의 자생적 균형 회복을 꾀하는 것(2)이 중기적 관점에서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책은 1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스 사태는 합리적 재정 적자 운영 방식에서 재정 긴축에 대한 무리한 강요로 급선회하려는 최상의 핑곗거리가 되었다.
신자유주의 강령 좇는 임기응변
긴축 전략이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책임자들'만 빼고 다 알고 있다. 주위의 다른 모든 나라들이 동일하게 긴축정책을 펴면 외수를 통해 내수 부진을 만회할 수 없다. 또한 재정지출 감축 효과는 세수 감소로 상쇄돼 성장이 둔화되는 결과만 초래한다. 이 모든 일은 국제 투자자들의 감시와 감독 아래 진행된다. 이들의 단기주의적 관점은 거시경제적 조절에 필요한 중기적 관점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제 패닉 상태에 빠진 투자자들이 투기적 공격을 감행하면 이율이 상승하고 공공부채 부담이 가중돼 정부가 더욱 가혹한 긴축안을 내놓는 악순환이 거듭된다(요컨대, 국채 원리 지급으로 적자가 가중돼 금융계가 이율을 올리면 다시 원리 지급 부담이 배가된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와 무디스 등의 신용평가사들은 이런 일반화된 광기를 확산시키는 대리인 구실을 완벽히 수행한다. 금융계의 패닉 상태가 야기하는 이율 상승과 이에 대응하는 비상식적 경제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유럽 정상회의가 열릴 때마다 매번 확인하는 바다.
여기서 우리는 혼돈이 전략으로 전환되는 패러독스를 목격한다. 즉, 경제가 혼돈에 빠질 때마다 신자유주의의 입지가 확대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위기는 기회가 된다. 2008년 가을 이후 구제금융 덕분에 살아난 은행들은 보너스와 배당금 잔치를 벌였다. 민간금융의 모순을 '공공재정 문제'로 전가하면서 문제의 초점을 흐리고 모순을 은폐하는 그들의 기술은 가히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는 어떤가. 공공재정 위기는 파국으로 치닫는 반면, 민간금융 위기의 직접적 효과는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었다. 금융사들은 긴급 구제자금을 모두 갚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사회에 진 빚이 없다며 당당해한다. 그 뒤 이어진 경기침체, 급격한 세수 감소, 재정 적자의 폭발적 증가 등은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다. 실수로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려놓고 화약값만 변상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폭발물 관리 견습생과 다를 바 없다.
긴축전략은 다 함께 망하는 길
신자유주의 어젠다를 충실히 따랐던 정치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역사의 평가 앞에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오래전부터 이들은 '페브로 보고서'(3) 혹은 '아탈리 보고서'(4) 등을 통해 모든 관심을 '공공부채' 문제에만 집중시킴으로써 여론 호도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희극적인 주술과 과장된 공포를 동원한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2008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지만, 민간금융 위기가 공공부채를 심화시키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게 가능하게 되었다. '공공부채 문제'에 대한 비객관적인 담론에 근거해, 기회주의적 전략가들과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또다시 한목소리가 되어 걱정스러운 표정 뒤에 기쁜 내심을 감추며 대대적인 개혁이 시급하다고 떠들어댔다. 그들이 2010년 봄 당시의 경제 상황에 맞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합리적인' 재정 정책이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상 사회적 국가의 축소, 심지어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구조적 전략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당시의 위기는 과거에는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그 뒤 퇴직 공무원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신규 채용 중단, 공무원 명목임금과 공공지출의 무자비한 삭감, 사회보장 급여 축소, 부가가치세 인상 등 익히 알려진 조처들이 단행됐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경제위기는 일거에 이런 조처들을 밀어붙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곧 양적 측면을 넘어 질적 변화를 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2010년 평범한 수준에서 제기됐던 재정긴축 논리가 2011년에 들어서자마자 '황금률'로 자리잡은 것(5)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공재정의 균형 문제가 헌법에 명시되는 전례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헌법이라는 최상위 법을 통해 모든 의문과 반대를 일소에 부침으로써 경제 운영을 정치적 규제에서 해방시키고 자율적 조절에 맡기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래된 꿈이었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실패를 원동력으로 삼아 전진하는 능력이다. 유럽 정상회의는 이런 자기변환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된다. 이 변환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현재의 긴축정책은 과거 자유주의자들이 고안한 기발한 위기 해결책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 그들은 또다시 새로운 묘책을 고안할 터이다. 유럽 국가 전체에 일반화된 긴축이 초래하는 해악적 결과가- 투자자들은 '재정 긴축'과 '성장'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다-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그들이 곧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고스란히 챙겨 새로운 영역을 찾아 이동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각국 정부는 이처럼 계속 바뀌는 시장의 요구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긴축이 성장을 둔화시키는 사태 앞에서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며(6)(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마저 '긴축+성장'(7)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는 듯 보인다), EU 집행위원회는 예상 성장률을 대폭 낮췄다. EU는 2012년 예상 성장률을 1.75%에서 0.5%로 하향 조정했다.(8) 영국은 2011년 성장률을 1.7%에서 0.7%로, 2012년 성장률을 2.5%에서 0.6%로 하향 조정했고, 프랑스도 1.75%에서 1%로 대폭 낮췄다. 독일은 주변국들의 위기 속에서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는 독일 경제가 수출의존적인 만큼 불가피한 일이다. 결국 독일 정부는 2012년 예상 성장률을 1.8%에서 1%로 하향 조정했다. 독립기관들은 이보다 낮은 0.8%로 예상했다.
희극적인 주술과 과장된 공포
모든 국가의 성장률이 동시에 둔화되는 상황에서 재정 적자 감소에만 매달리는 정책은 부정적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끔찍한 악순환을 초래한다. 각국 정부는 불분명하게나마 이 사실을 깨닫고 방향 전환을 꾀하지만 지금까지 진행해온 긴축정책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런 식으로는 새로운 방향 속에서 발전을 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국가와 임금노동자의 저항은 눈엣가시다. 물론 이렇게 직설적으로 거칠게 고백한 적은 없다. 대신 공공부채를 문제 삼아 국가에 압력을 가하고, '인건비와 경쟁력'을 운운하며 노동자를 공격한다. 이제 긴축이 부딪힌 한계가 그들에게 새로운 출구를 마련해준다. 그들이 내세우는 '적자 감축'이라는 목표를 보더라도 긴축이 초래하는 해악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 이번엔 '경쟁력 제고를 통한 성장 회복'이라는 논리를 들고 나오면 된다. 다시 말해,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되는 생산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그런 기미가 보이지만, 우리는 곧 긴축만 주장하던 유럽의 경제정책이 수출경쟁력 강화를 통한 성장 회복 논리 쪽으로 조금씩 전환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내수 진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댈 곳은 이제 수출뿐이다. '대내절하'(국내에서 화폐가치 절하)라는 말로 포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1980년대의 경쟁적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9)의 재탕이라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최소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선, 설사 이 정책의 내재적 효과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중·장기적 관점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독일은 현재의 비교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10년 넘게 임금억제 정책을 고수했다). 다시 말해, 이 정책을 통해 성장회복과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 감축이라는 목표를 단기간에 달성하기란 불가능하다.
뒤늦게 성장률 전망치 낮추느라 허둥
모든 유럽 국가들이 동시에 이 전략을 채택한다는 생각 자체에 이미 실패가 예정돼 있다. 일방적 방향만을 전제로 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비교우위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모든 유럽 국가들이 앞다퉈 독일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이 전략이 일반화된다면 자기파괴적 결과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 재정 긴축에 덧붙여 임금 삭감을 감행할 경우, 외수가 늘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내수를 더 압박해 상황만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이다. 효과 없는 정책으로 명백한 실패를 거듭해도 그들에게는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그사이 이미 제도적 승리를 확보해두었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 3월 체결된 '유로협약'에는 이미 그들이 설정한 주요 목표가 명시돼 있다. 즉 연금 삭감, 용이한 해고, 임금협상 테이블 분산, 고용 보장(정규직·공무원) 해체 등 유연화가 가능한 것은 모두 유연화돼야 한다는 논리가 관철됐다. 이 목표는 또다시 고집스럽게 반복될 상투적 경제정책들에 반영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재정 위기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각국 정부에 이런 정책 전환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할지 의문이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신자유주의는 위기의 폭발을 지연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모순으로 자멸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금융사들은 한계상황으로 치닫는 논리와 뒤섞인 '패닉' 상태에 빠져 구제 대상 국가들을 주목하고 있다(잠재적 전리품이 클수록 그들의 흥분도 증폭된다).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탈리아는 베일아웃(Bail Out·구제금융)을 통하지 않고는 위기에서 탈출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 테크노크라트가 총리 자리에 오르자, 이 한심한 정치적 선택 앞에서 언론마저 등을 돌렸다. 이탈리아의 신임 총리 마리오 몬티와 그리스의 신임 총리 루카스 파파데모스에 대해 인정할 거라고는 수완이 좀더 뛰어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실패가 예정된 마당에 수완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들이 전임 총리의 전례를 따르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오히려 실패가 예정된 대내절하 정책을 추진해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지 모른다. 마리오 몬티는 오랜 기간 EU에서 일하며 유로화가 이탈리아의 재정 문제를 '독일식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역사적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해왔다.(10) 몇 년 뒤에 지금을 돌이켜본다면 비상식적인 이번 총리 지명은 몰락해가는 시스템의 절망적 몸부림에 불과했음이 밝혀질 것이다. 이들은 각각 골드만삭스의 임원과 ECB 부총재를 지냈고, 이미 파산한 자유주의 교리 전파에 앞장서는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했다.(11) 한마디로 지금까지 실패한 모든 경제정책을 대변하는 전형적 인물들이다. 물론 그들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전문가'를 자처하는 모든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민주주의를 경멸한다는 것이다.
구세주로 등장한 두 사람이 현 상황을 타개할 뾰족수를 찾지 못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은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를 구해줄 만큼 충분한 여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비공식적 계산에 따르면,(12) 이탈리아에 필요한 EFSF의 잠재적 구제금융 규모는 6천억 유로에 달한다. 그러나 EFSF의 예산은 현재 4400억 유로에 불과하다. 지난 10월 27일 열린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예산을 1조 유로까지 확대하겠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자금 확보 방안이 마련된 것은 아니다. 독일은 분담금 상한 기준을 고집하고 있고, 도움 요청을 받은 제3국들(중국과 중동 산유국들)은 유럽과 함께 난파 직전의 배에 오르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위기를 간신히 진화한다고 해도 스페인, 심지어 프랑스 같은 국가들에까지 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로 추가되는 구제금융 대상 국가들은 비극적인 시소 효과 때문에 EFSF의 문을 두 번 두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구제금융을 통해 자국의 재정 문제를 해결했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구제 대상 국가가 추가될 때마다 필연적으로 구제기금 분담이 가능한 국가가 줄어들어 분담금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채무에 허덕이는 국가를 돕는 국가들 역시 과도한 채무를 지게 되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굳이 긴급구제를 선언하지 않더라도 EFSF에 두 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부담하는 프랑스의 신용가치가 하락할 경우 그 여파는 EFSF에도 미칠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젠 노동자 임금에 손댈 것
자금 부족에 허덕이는 EFSF는 이런 이유로 제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걱정에 사로잡힌 전문가들은 분명 위기에 빠진 정부와 공모해 EFSF로 하여금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회원국의 국채를 사들이게 함으로써 국채 금리를 떨어뜨리려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자금력에 한계가 있는- 투자자들은 끊임없이 이 한계를 시험하려 들 것이다- 구제기금에 적합하지 않다. 잠재적으로 무한하게 화폐를 발행할 권한을 가진 중앙은행만이 투기를 억제할 수 있다. 물론 중앙은행이 그런 결정을 내리고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만 놀란 투기꾼들이 시장에서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ECB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ECB는 최근 시장 개입을 시작했지만 소극적이고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항상 상황이 심각한 선을 넘어서야 뒤늦게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ECB 역시 잘못된 유럽 경제정책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각국이 독립적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유로존 회원국으로 묶인 상황에서, ECB는 비합리적 도그마에 갇혀 경직된 규칙과 독일식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혼란을 방기하고 있다. 현재 궁지에 몰린 ECB는 중재자로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시늉만 내고 있다. ECB는 현재 요구받는 대규모 유동성 투입이 재정 상황이 악화된 국가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것밖에 안 되며, 더 나아가 그 국가로 하여금 문제가 있을 때마다 결국 손 벌릴 곳은 ECB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라고 염려한다. 혹은 ECB가 고수하려고 애쓰는 긴축이라는 교리가 무시당하는 사태가 발생할까 걱정한다. 그러나 사태를 방관할 경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어져 유로존 해체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위험 역시 존재한다. 그럼 당연히 지금 같은 형태의 ECB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유럽재정안정기금, 화수분 아니다
스스로 세운 원칙을 위배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 이것이 ECB를 괴롭히는 딜레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자신의 원칙을 지나치게 희생시킴으로써 ECB는 유로화와 마찬가지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건 아닐까? 불경기를 조장하는 논리가 일반화되고 맹목적 긴축이 부정적 결과를 야기하는 상황이 사방에서 투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 결과 금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이탈리아의 경우, 10년 만기 국채 이자가 10월 중순 5.8%에서 11월 중순에는 7.5%로 올랐다). 동시에 국가 채무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프랑스는 현재 숨죽이며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프랑스는 아직까지 안전한 회색지대에 있지만, 이미 신용평가사에서 흘러나오는 루머와 재정건전성을 의심하는 보고서들(13)의 표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전례로 미뤄보건대, 프랑스 역시 투기꾼들이 가하는 공격의 희생양이 되어 결국 EFSF 문을 두드릴 확률이 높다. 물론 돈을 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꾸기 위해서다.
신자유주의 죽고 인민이 사는 선택은?
반복적으로 열리는 유로존 정상회의는 유럽 단일통화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을 끊임없이 재확인할 뿐이고, 구세주로 여겨지는 테크노크라트들은 차례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차례로 구제금융 대상국으로 전락하면서 다른 국가들을 악순환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다시 그리스, 곧 스페인, 어쩌면 프랑스까지) 절망적 상황에 처한 유로존은 죽음을 앞둔 환자 모습을 하고 있다. 유로존은 현재 부활이 아니라 해체를 향해 가고 있다.
무엇이 해체될까. 인민과 신자유주의의 해체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이는 현 시대의 패러독스가 제기하는 전망이다. 곧 신자유주의자들은 총알이 더 이상 남지 않는 순간을 맞을지 모른다. 어리석은 대내절하 정책은 차치하고라도, 현재 유럽을 구원할 유일한 해결책인 연방제도가 실현되려면 최소 5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과연 금융인들이 그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 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고 은행들이 쓰러진 뒤 남게 될 폐허는 자유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최소한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될는지 모르겠다. 지배자들은 결코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는 법이 없다. 이들을 굴복시키려면 시스템 붕괴의 충격에 의해서든 내부 반란에 의해서든,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만약 후자의 힘이 전자의 힘을 추동해낸다면, 결과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다. 양자택일의 싸움이라면, 신자유주의는 죽고 인민은 살아야 한다.
글 / 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최근 저서로 (Le Seuil·파리·2011)가 있다.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2010년 5월 9일 '그리스-1', 2010년 11월 28일 '아일랜드-포르투갈', 2011년 3월 11일 '유로협약', 2011년 7월 21일 '그리스-2', 2011년 10월 27일 '그리스-3'.
(2) 경기후퇴 시기에 의도적인 적자 증액은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경기회복 효과를 가져온다.
(3) 완전히 중립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손쉬운 공공부채와의 단절'(La Documentation franéaise·파리·2005).
(4) '프랑스 성장력 제고 방안', La Documentation franéaise, 파리, 2008.
(5) 유로존 정상회의, 2011년 3월 11일.
(6) 국제통화기금, 'World Economic Outlook', 워싱턴, 2011년 4월.
(7) 긴축이 반드시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고안해낸 모순어법이다.
(8) 'European Economic Forecast', 2011년 가을, 경제금융총국,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9) 피에르 베레고부아 정부가 1984∼93년 추진한 경쟁적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은 통화가치 절하 대신 임금 억제를 통한 경쟁력 제고를 통해 수출 주도의 성장을 지향했다.
(10) Charlemagne, 'The euro's existential worries', , 런던, 2010년 5월 6일.
(11) 루카스 파파데모스는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고, 마리오 몬티는 이탈리아 보코니대학 총장을 지냈다.
(12) '종말의 시작', La pompe à phynance, Les blogs du Diplo, 2011년 8월 11일.
(13) 가령 EU 싱크탱크 중 하나인 'The Lisbon Council'에서 펴낸 보고서(2011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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