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9

[세상 읽기] 정치가 내용 없이 격렬하기만 할 때 / 박상훈

민주정치가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합해내는 비결은, '갈등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갈등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 비정규직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이를 해당 기업의 노사문제로 제한함으로써 갈등의 범위를 축소할 수도 있다. 혹은 노동시장 정책을 바꾸는 문제로 접근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어떤 경제체제를 만들 것이냐 하는 더 큰 차원에서 대안을 생각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갈등 범위를 축소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 갈등 강도를 높이는 반면, 갈등 범위를 확대해 접근하는 것이 사회 안정과 통합에 효과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처럼 노동문제를 기업 내 노사관계로 제한하고자 하는 나라도 없지만 갈등 강도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인 반면, 이를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중심 문제로 다루는 나라들의 경우 훨씬 더 평화롭고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그 실례라 할 수 있다.

정당체제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정치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당들이 대표하는 이념적·계층적 기반이 매우 좁고 모호하다는 데 있다. 한나라당을 보수정당이라고 할 때, 그들이 갖는 보수이념이 뭔지 혹은 있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구성도 그렇다. 사회 상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지표의 다수는 여전히 서민층이다. 민주당의 이념적 빈곤도 못지않다. 특정 사회 계층으로부터 민주당이 차별적인 지지기반을 구축한 것도 아니다. 지금과 같은 비정규직 문제가 시작된 것은 지금의 민주당이 집권당일 때였으며, 최근 한나라당이 밀어붙인 한-미 자유무역협정도 그때 추진되었다. 분명 두 정당 사이에 차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과연 '종류가 다른 정당' 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 그런데 이들 간의 갈등의 강도는 거의 전쟁 수준일 때가 많다. 혹자는 그 때문에 대표되는 사회 갈등의 범위가 확대된 효과가 있지 않았냐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외양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여야 모두 경쟁적으로 복지를 말하고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 개선에 소리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기존 정당들의 사회적 기반은 넓어졌을까? 그렇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신뢰는 계속 낮아진 반면, 기존 정당을 넘어선 제3세력의 등장을 갈구하는 사회심리는 커졌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기존 정치가 내용 없이 격렬하기만 한 적나의 권력투쟁으로 일관한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지난 정부에서 권력을 상실한 집단들의 정서는 맹목적인 '반디제이', '반노무현'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주류 언론의 보도행태가 이를 실증했다. 지금은 다를까? 글쎄,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지금의 야권이나 비판언론의 정체성은 상당 정도 '반엠비' 그 자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엠비'가 정권교체를 위해 효과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한국 정치의 악순환 구조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강요하는 양극화된 의견 구조는 소리 없는 다수의 의견을 억압하는 부작용도 있다. 거기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양극화된 악순환 구조에 불만을 갖는 시민들이 기존 정당과 언론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 구원자를 찾아 나서거나, 아니면 아예 공적 세계로부터 이탈해 자신들만의 세계로 도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대안 세력이라면 누구를 위해 어떤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고자 하는지부터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내용 없이 공허한 권력투쟁이 지배하는 정치를 너무 오래 지속하고 있다.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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