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08

'노무현 시대’를 되짚는 시선들- 고동우, 시사인 62호, 2008-11-19

'노무현 시대’를 되짚는 시선들
'대통령 노무현’ 또는 ‘노무현 시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당사자의 귀환으로 흥미까지 더한다. 참여정부는 과연 현재의 경제위기와 사회 양극화에 별 책임이 없을까.
[62호] 2008년 11월 19일 (수) 10:34:44고동우 기자  intereds@sisain.co.kr
   
ⓒ뉴시스
지난해 7월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제2차 금융허브회의. 일각에서는 참여정부의 과도한 금융 자유화 정책이 현 경제위기의 근간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어쨌든 그가 돌아왔다. 책임 전가용이나 향수의 대상으로 ‘본의 아니게’ 종종 불려지다가, 마침내 그 자신이 직접 세상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을 때, 최고 권력자를 역임한 정치인으로서든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든 ‘대통령 노무현’이 그냥 이대로 잊혀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귀환과 함께 그간 잠복되어온 논점 또한 다시 기지개를 켠다. 세월이 세월이라 화두는 역시 ‘경제’다. 흥미로운 것은,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주변 인사들이 꽤 공세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노 전 대통령이 지난 9월 말 한국정치학회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대목을 보자.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방과 민영화, 노동의 유연화를 추진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권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비판하는데 저는 조금 생각을 달리합니다. 오히려 관치경제를 종식시켰고, 개방을 강조했을 뿐 진보적 측면에서의 후퇴는 없었다고 봅니다. 이는 참여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개방을 강조한다는 것이 곧 신자유주의 정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소득 격차를 확대시키고 경제 양극화를 결과하는 정책은 김대중 정부나 참여정부에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점잖게 했지만, 이는 진보·개혁진영 내에서 통용되는 ‘일반 상식’에 대한 전면 부정이나 다름없었다. 요약하면 참여정부는 신자유주의와 무관하고, ‘경제 민주화’를 충실히 이행해왔으며, 사회 양극화에 별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된 “최근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까지 더하면, 사안은 더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은 대부분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힘이나 현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인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무관하고 양극화에 책임 없다?


근래 학계나 관련 전문가를 중심으로 ‘노무현 시대’를 다룬 책과 논문이 잇따라 발표되는 것은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좀체 가라앉지 않으면서 “아, 그리운 옛날이여” 류의 ‘복권’ 시도가 마침 한창이었다. 여기에 ‘문제의 당사자’(?)까지 논쟁에 뛰어들었으니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댓거리판은 없다.

가장 전면적으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다룬 책은 <양극화 시대의 한국경제>(후마니타스)다. 부제 자체가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이다. 이 책은 지난 5년을 “과감하게 ‘양극화 시대’로 정의”하면서 대외 통상정책, 금융정책, 노동정책, 연금정책이 어떻게 “소득 격차를 확대시키고 경제적 양극화를 결과”했는지 파헤친다. 유태환 교수(경희대 국제대학원), 박종현 교수(진주산업대 산업경제학과) 등이 필자로 참여한 이 책의 결론은 “노무현 정부는 복지와 평등을 명시적으로 강조했지만, 시장 논리에 대한 지나친 낙관적 믿음 때문에 집권 기간 양극화의 심화를 겪었다”라는 것이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위기의 한국경제>(휴먼앤북스)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노무현 정부가 5년 동안 위기를 알게 모르게 키워왔고, 이명박 정부는 한 단계 더 증폭시키고 있다”라고 ‘경제위기 책임론’을 직접 거론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정책이다. 저자는 “한국은 지난 2000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비생산적인 부동산 투기에 몰입해온 나라이다. 그 결과 성장 잠재력이 크게 훼손되었다”라며 노무현 정부는 시급히 부동산 투기 버블을 깨뜨려야 했으나 ‘해결할 기회와 해법을 손에 쥐어줘도’ 문제 해결을 못했다고 비판했다.

  
학계에서는 ‘노무현 시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왼쪽부터 <위기의 한국경제> <양극화 시대의 한국경제>, 계간 <비평>.
금융경제연구소는 지난 10월 한 내부 보고서에서 “노무현 정부의 금융정책은 최근 몰락한 미국식 금융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고, 이명박 정부 역시 이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라며 단기외채, 가계부채 증가와 은행 부실은 ‘미국 모델 벤치마킹’의 필연적 결과라고 밝히기도 했다. 동북아 금융허브,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한국투자공사 설립, 초대형 금융복합체 창출 등을 통해 금융산업을 ‘실물경제 지원사업’을 넘어 그 자체로 ‘고부가가치 창출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노무현 정부의 시도가 현재 위기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개혁 진영 ‘공동책임론’ 제기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경제 민주화’ 관점에서 노무현 시대를 짚는다. 노 정권 출범에 관여했던 유 교수는 계간지 <비평> 가을호에 기고한 글에서 “노무현 정부는 경제 민주화의 철학을 갖지 못했다. 좌파적 경제정책은 별로 없었고 오히려 우파적 정책이 더 많았다”라고 당사자의 항변(?)과는 사뭇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사조가 시대착오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경제 민주화를 저해했다. 개혁의 강조점은 신자유주의 쪽으로 옮아갔다. 그 정점에 한·미 FTA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10년간 좌파적 경제정책으로 성장이 정체된 것이 한국 경제의 핵심 문제라고 진단하지만, ‘잃어버린 10년’ 동안 정말로 잃어버린 것은 성장이 아니라 경제 민주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진영은 이런 류의 비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이는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이 지난 10월 초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노무현 알리바이론 1편-진보·개혁 세력에게’라는 글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진보·개혁 진영은 ‘신자유주의에 물든 민주정부’라는 입론까지 덧붙여서 민주정부 10년과 참여정부 5년을 실패로 규정하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결과론적으로 지지율이 떨어지고, 경제 양극화의 과제가 심화되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이런 주장의 명백한 증거처럼 제시된다. 그래서 진보·개혁 진영은 서슴지 않고 노무현 정부는 실패한 정부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응답은 앞서 잠깐 언급했듯 상당히 공세적이다. 노 대통령처럼 ‘전복적’이기까지 한 것은 아니나, ‘진보·개혁 진영 전체의 공동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혹시, 아무런 밑천도 들이지 않았으면서 고스톱 한 판 치고 나면 모두가 다 잃었다고 주장하는 형국은 아닌가. 참교육만을 말하지 어떻게 국민 대다수가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극복시킬 것인지 대안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집권 세력이 될 수 없다. 비정규직 철폐만을 주장하지 어떻게 비정규직의 고통을 줄이면서 노동시장에서 노동과 기업의 대안을 만들 것인지에 대해 답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집권 세력이 아니다. 대한민국 진보·개혁 진영은 자기 혁신을 해왔는가. 그것을 게을리 한 채,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에게 모든 알리바이를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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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 진영에서는 사회 양극화 해소와 경제 민주화에 반하는 대표 정책으로 한·미 FTA를 꼽는다.
안 최고위원뿐만이 아니다. 참여정부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정해구 교수(성공회대 정치학과)도 최근 한 토론회에서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으로 진보를 표방하는 듯했지만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에 기울게 된 것은 원래 성격이 그랬다기보다 진보 학계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정 교수는 또 이 자리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광풍은 20세기의 진보적 성과들을 무력화하면서 새로운 시장지상주의적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심지어 반독재 민주화투쟁, 민중투쟁, 시민운동을 통해서 성립한 ‘민주정부’들마저 신자유주의 정책의 포로가 되게 만들었다”라며 ‘외부 요인’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때문에’론을 경계한다

박상훈 박사(정치학·후마니타스 대표)는 노 전 대통령 측의 이같은 논리에 대해 “액면으로는 사실에 가까울 수 있지만 참여정부에 관련된 사람들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학계 또는 사회운동 쪽에서 ‘우리도 대안이 없었다’고 스스로 반성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난 정권 쪽에서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민주주의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기본 책임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기를 요청한 사람들,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에게 있다. 또한 정부는 어마어마한 예산과 권력을 지니지 않았는가. 학계나 사회운동 진영은 조건도 다르지만, 본디 자기 이해에 충실한 집단이다. ‘희망’을 전할 수는 있지만 책임을 물을 대상은 아니다.”

그는 이른바 외부요인론, 즉 ‘신자유주의 때문에’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보낸다. “‘다른 나라도 다 세계화에 영향받고 있다’는 식으로 민주파의 실패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거나, 혹은 외적 변수에 원인과 책임을 귀속시키는 소극적 접근으로 끝날 수 있다”라는 염려에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면밀한 분석과 실증이다. 이를테면 박상훈 박사가 강조하듯 “다수 진보 인사의 존재나 역할은 독립 변수가 되지 못했고 IMF·미국·경제 관료·재벌의 요구가 그대로 정책이 되었다는 설명은 얼마나 현실성이 있나? 분명히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을 선택하고 결정했는데 정작 이들은 어떤 경제정책을 하고자 했는지, 아니면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비전이 있기는 했으나 구체적이지 못해서 안팎의 외생적 요구에 굴복한 것인지, 굴복했다면 그 과정에서 이들의 비전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등등에 대한 규명” 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노무현 시대 5년은 이제 일방적인 증오나 향수의 대상에서 자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안고 탄생한 이명박 정부도 결국 몇 달이 채 안 돼 바닥을 헤매는 중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의 몰락을 즐기기만 했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공부를 안 한 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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