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08

‘국가란 폭력을 독점하는 정치 결사체’- 장정일// 시사인 190호, 2011-04-30


‘국가란 폭력을 독점하는 정치 결사체’
[막스 베버-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따르면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라는 구호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릇된 환상의 산물이다. 통치자 시각에서 정치를 바라본 이 책은 정당·선거에 무관심한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190호] 2011년 04월 30일 (토) 01:08:10장정일 (소설가)
<막스 베버-소명으로서의 정치>(폴리테이아, 2011년)는 정치학자이자 ‘민주주의 이론가’인 최장집이 구상하는, 서구 정치철학자 12명에 대한 강의록 가운데 한 권이다. 시대순이나 기원을 쫓자면 당연히 플라톤이 앞서야 했으나, ‘우리 현실에서 좀 더 시급하게 읽혔으면 하는 정치철학자를 먼저 고려’한 까닭에, 베버가 선두 주자가 되었다. ‘일석이조’ 형식으로 편집된 이 책의 앞부분에는 최장집이 쓴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해제가, 뒷부분에는 박상훈이 옮긴 베버의 원저가 딸려 있다. 옮긴이는 올해 초에 <정치의 발견>(폴리테이아)이라는 정치학 입문서를 출간했는데, 그 기저에 깔린 것도 베버다.

“피지배자는 지배 집단의 권위에 복종해야”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국가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란, 폭력·강권력을 독점으로 행사하는 정치 결사체이다. 물론 그것이 통상적이거나 국가가 의존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폭력·강권력은 국가를 국가이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다. 국가의 탄생에 초석적 폭력이 있다는 이런 주장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홉스와 루소를 비롯한 숱한 계몽주의자들의 어슷비슷한 사회계약론을 단순화하고 변조할 필요가 있다. 즉 사회계약론이란, 인민들 사이의 폭력을 제어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라는 권력에 물리적·사법적 폭력의 권리를 반납하는 것이다. 그러고서야 사회는 야수들 간의 쟁투를 멈춘다.


  
ⓒ이지영 그림


국가에 대한 베버의 정의는 그리 낯설지 않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정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고도 남는다. 이른바 민주주의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이 주권을 갖는 체제다. 이런 수사야말로 시민이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베버는 시민이 주권자인 그런 민주주의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민주주의는 데마고그(선동)의 힘과 카리스마와 대의(열정)를 갖춘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된 다음, 투표자였던 시민을 통치하는 제도다. 베버는 이런 통치권자를 낳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대중적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기초한 독재’라고 표현한다. 여느 정치제도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국가가 존속하려면 피지배자는 그때그때의 지배 집단이 주장하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소명으로서의 정치>막스 베버 지음최장집 엮음/박상훈 옮김 폴리테이아 펴냄
최장집의 해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베버는 국가나 정당 같은 자율적 정치조직이 인민 주권, 인민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운영되고 그로 인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도 어디까지나 정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고, 인민은 엘리트를 선출하는 수동적 역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를 가리켜 ‘최소 정의적 민주주의’라고도 하고, ‘지도자 민주주의’라고도 한다는데, 최장집과 박상훈은 이런 민주주의에 가감 없이 동의한다. 2008년 촛불시위를 달구었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공화국의 주권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구호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릇된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소명으로서의 정치>의 첫머리가 국가에 대한 베버의 정의로 시작했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국가란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폭력·강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바로 국가일 수 있다는 베버의 정의는, 어떤 지도자에게 안심하고 권력을 맡길 수 있을지에 대한 베버식의 문제의식으로 나간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상당히 수미일관한 구조를 보인다. 베버에 따르면, 국가라는 폭력·강권력을 소유할 지도자는 어떤 수난도 마다하지 않는 열정(대의)과 대의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균형 잡힌 차가운 판단을 할 수 있는 기본적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이때 대의나 판단에서 윤리를 내세우는 사람은, 정치 낙오자다.

통치자의 자리에서만 바라본 정치


자신의 영혼이나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사람, 또는 국내 정치나 국제 외교에서 윤리를 내세우고 싶은 사람은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해서는 안 되며’, 차라리 ‘소박하고 순수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형제애’나 도모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누누이 말했듯이 국가의 운용이나 정치는 한 쌍의 악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베버는 윤리를 완전히 팽개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도덕적 당위에 해당하는 신념 윤리와 세속적 현실에서 정치가가 감수해야 할 책임 윤리를 구분하고 있는 그는, 두 윤리 사이의 조합과 균형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정치가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지은이의 포부와 무관하지 않듯이,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재건과 상관이 있다. 덧붙여 1919년에 발표된 이 책에는 러시아 혁명과 독일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베버의 대항 의식도 짙게 투영되어 있다. 이런 난세에 구상된 두 사람의 정치철학은 정치 지도자의 설득력(언어 구사력)을 중시한 것 말고는, 그 어느 것도 온화하지 않다. 두 사람이 시간을 두고 당도한 사상은 ‘현실에서는 악’이 더 능률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와 베버를 묶어주는 최대 공통점은, 다름 아닌 두 사람의 발화 위치이다. 마키아벨리와 베버는 모두 군주(통치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정치학을 펼쳤다. 당연히 그들의 정치학에는 피통치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통치자 처지에 선 베버는 끊임없이 “정치에 관여하려는 사람, 즉 권력과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에 관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악마적 힘과 거래를 하게 되며, 그의 행위와 관련해서 보면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실로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만약 그것이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과 같은 난세에서가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과 같은 공공연한 과두정이 일상적으로 벌이는 악이라면, 왜 피통치자는 그 악을 고스란히 감당하면서, 피통치자 나름의 악마적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까? 그게 직접 행동이든 가두시위든, 하다못해 주민소환 제도든 말이다.

베버는 경제적 토대가 없는 계층이 정치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염려했던 만큼, 자신이 부르주아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치와 같은 반동이나 볼셰비키에 맞서기 위해, 오로지 정당과 의회만을 신뢰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점, 정당을 혐오하고 선거에 무관심한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