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공격’에 오바마·클린턴이 대처하는 방법 | ||||||||||||
클린턴은 공화당의 “예산안 감축” 요구를 잘 이용해 재임에 성공했다. 오바마도 ‘2012년 회계연도 예산안’을 두고 예산 삭감 공격을 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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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선거에서 집권한 클린턴은 미국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거나 지도자로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55%의 투표율과 그중 절반에도 못 미치는 43% 지지로 당선되었다. 클린턴은 전통적인 민주당 눈높이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중도주의를 취했다. 범죄에 대한 강경한 태도나 국민 개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 등에서 전통적인 민주당의 노선과는 달랐다. 덕분에 양당의 중간 지대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는 민주당의 버팀목인 시민사회의 진보 세력이 급격하게 퇴조하는 분위기였으며, 보수 세력도 오랜 ‘레이건 혁명’에 따른 피로로 새로운 탈출구를 찾던 중이었다. 그러나 취임 초 클린턴은 자신이 얻은 지지율을 잠시 망각했다. 과도하게 추진한 의료보험 정책이 공화당의 격렬한 저지와 여론의 역풍을 맞아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1994년 맞은 중간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오랜 아성이던 하원에서마저 다수당 지위를 빼앗겼다. 벼랑 끝 위기였다. 일부 성급한 전문가들은 “클린턴은 이미 끝났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여소야대를 맞이한 1995년 새해 벽두 워싱턴의 분위기가 이랬다.
그러나 오바마는 사회 보수 세력의 결집을 막지 못했다. 바로 공화당의 대중 외곽 단체를 자임하고 나선 ‘티파티’가 그것이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오바마는 ‘티파티’에 참패를 당했다. 클린턴은 어젠다가 분명치 못해서 패했고, 오바마는 어젠다가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패했다. 1994년 클린턴은 공화당의 깅리치에게 졌지만, 오바마는 공화당의 모자를 쓴 시민사회 보수 세력에 졌다. 취임 후 2년 동안 이룩한 금융 개혁, 의료보험 개혁에 대해 국민과 소통이 부족했던 것을 패인으로 인정하고 의회와 정면 대결을 선언했다. 클린턴은 의회를 집단 개념으로 상대했는데, 오바마는 의원 개개인을 상대하면서 나섰다. 2011년 새해 벽두 워싱턴 정국이 이렇다. 1995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클린턴이 맞은 첫 번째 난관은 ‘1996 회계연도 예산안’이었다. 클린턴이 1992년 선거를 통해 ‘접수’한 미국은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은 형편이었다. 레이건 8년 동안 이른바 ‘우주 전쟁’에 퍼붓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걸프전쟁에 쏟아부은 돈으로 인해 정부의 재정 적자가 최악이었다. 자신들의 실정(失政)으로 최악 상황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국민에게 가장 민감하게 작용할 어젠다인 ‘재정 적자’를 들고 나왔다. 상원과 하원 양쪽을 점령한 공화당은 풋내기 클린턴을 얼마나 빨리 워싱턴 무대에서 쫓아내는가에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정부의 재정 적자로 인해 미국이 위기에 처했다며 행정부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수준의 예산안 감축을 주장했다. 공화당은 국가의 균형 재정을 위해서 사회복지 부문의 대폭 삭감을 주장했다. 시민권자에 한해서만 복지 혜택을 주자는 것이 당시 공화당 주장이었다. 주로 소수계 이민자 그룹으로 이뤄진 비시민권자 수혜자(3000만명 추산)에게는 복지 혜택을 금지하자는 주장이었던 셈이다.
클린턴은 공화당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전략으로 ‘균형 예산’을 대폭 받아들였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이 그것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클린턴은 의회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공화·민주 양당을 무시한 채 직접 국민 앞에 나섰다. 국민이 원하는 사안인 만큼 7년 내에 정부 재정을 균형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클린턴은 이렇게 국민과 직접 소통하면서 순식간에 국정 운영권을 틀어쥐었다. 클린턴은 균형 예산안을 내긴 했지만 복지 예산 삭감이라는 공화당의 방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의회에서 통과시킨 공화당 예산안을 끝내 거부했다. 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폐쇄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클린턴은 정부 폐쇄의 책임을 공화당에 뒤집어씌우는 데 성공했다. 때마침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 사건, 코소보 사태 등 대형 사건이 터졌고, 이는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더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공화당보다 더 우파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들고 나옴으로써 클린턴은 ‘아랫도리 추문’과 좌파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임에 성공했다. 2011년 오바마를 공격하기 위한 공화당의 첫 번째 무기도 ‘2012년 회계연도 예산안’이다. 오바마는 최악의 재정 적자 정부를 물려받았다. 조지 부시가 8년 동안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을 거덜 내고 말았다. 빚더미 정부에 이어 세계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뉴욕 월스트리트까지 부도가 났다. 서민들이 노후 대책으로 모아놓은 돈을 대형 투자은행들의 부도를 막아내는 데 쏟아부었다. 은퇴 연령을 연장하고 사회복지 혜택 연한을 줄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2년 동안 별별 방법을 다 썼지만 오바마 정부는 끝내 실업률을 줄이지 못했다.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빼앗은 공화당은 공격 수위를 한껏 높였다. 공화당은 의료보험 개혁을 되돌려놓고 사회복지 예산을 줄이라고 요구한다.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를 구분하자는 주장이다. 이것은 예산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오바마의 이민 개혁과 이민정책에 대한 전면적 반대를 뜻한다. 지난 2월14일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2012회계연도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간 쟁점은 예산 삭감(사회복지 예산)과 그 범위이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저소득층에 대한 의료지원 제도), 사회보장 제도 등의 비용을 줄이라고 주장한다. 저소득층 학자금 지원 예산과 난방비 보조, 환경보호 예산 또한 삭감하라고 요구 중이다. 재집권을 위해 당파 싸움을 벌인 클린턴과 달리, 오바마는 현재 논란이 되는 사회복지 예산을 줄이려면 제도를 없앨 것이 아니라 수혜자를 줄여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거대 예산이 들어가는 메디케이드 수혜자를 줄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민권자와 영주권자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수혜자를 3500만명 줄일 수 있다. 이로 인한 후폭풍은 미국 내 한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한인의 시민권 취득 열풍이 서서히 일고 있다. 클린턴 집권 중반기인 1995~1996년 한인 사회에 불었던 시민권 취득 바람을 연상케 한다. 15년 전 예산안 싸움에서 클린턴에게 뒤통수를 맞고 쓴맛을 본 공화당은 이번만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다. 공화당이 제출한 예산안에는 그간 공화당이 주장해온 어젠다가 모두 들어 있다. 감세를 확대 연장하고,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를 작게 만들고, 시민의 권리를 축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재정 적자에 시달리던 정부가 대도시 극빈자에게 제공하던 혜택을 갑자기 줄인 결과가 1992년 4월29일 발발한 로스앤젤레스 폭동이었다. 공화당과 오바마의 예산안이 충돌하는 가운데 4·29 폭동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
2011-08-08
공화당 ‘공격’에 오바마·클린턴이 대처하는 방법- 시사인 김동석, 183호, 201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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