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비판과 금기의 성역에 도전하는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세상에 선보이고, 우리 사회의 실명비판이라는 새로운 비판문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와의 인터뷰를 3월 1일 삼일절에 성사시킬 수 있었다. 강 교수는 평생 한번은 꼭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인물이다. 그만큼 언론개혁을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포함해서 우리사회에 지대한 공언을 했고, 언론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아왔으면서도 인터뷰는 커냥 공식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분이다. 그래도 마음이 약해 얼굴을 보면 잘 거절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재작년에 전주를 한번 찾아갔었지만, 조교와 통화만 한 후 '전주에 안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고, 작년에도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본 후 다시 한번 전주에 있는 강연회장으로 찾아가서 인터뷰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했었다.
강준만 교수를 차안에 납치하듯 태운 채 부산에서 전주까지 주행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올해 또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본 후 조만간 꼭 한 번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었다. 다른 매체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렇게 어려운 기회를 잡은 것일텐데,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라는 의구심이 들었고, '혹시 나도 저렇게 밖에 못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사실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으나, 부산에서 국민개혁정당과 부산 인사모 공동 주최로 강교수 강연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웬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 밤을 꼬박 새고, 그 다음날까지 인터뷰 질문 100개를 작성했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다. '아, 이건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야', '이걸 어떻게 물어봐야 좀 더 재미있는 대답이 나올까?' 이런 저런 생각도 많이 들었다. 뒷풀이 장소에서 슬쩍 '나중에 시간 좀 내달라'고 부탁했지만, 난색을 표명하셨다. 그러다가 같이 내려간 서울경기 인사모의 새밀님이 강교수님을 내일 전주까지 차로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인터뷰가 성사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얼굴 마주쳤을 때 거절하기 힘들어하는 강교수가 차를 같이 타고가면서 불편한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서라도(?) 인터뷰에 응해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도 승낙은 받아야할 것 같아 변희재와 같이 계속 설득했고, 새벽 4시에야 구두 승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일어났는데, 인터뷰가 부담스러웠는지 강교수는 고속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고, 난 또 아찔한 기분이 들었으나, 일행들은 반강제(?)로 차로 모셔다 드린다고 했고, 그때부터 인터뷰 끝날때까지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인터뷰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허접하더라도 인터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는데, 차안에서 이루어진 2시간동안의 인터뷰는 다행히 비교적 만족스러웠지만, 오히려 내가 지나치게 강교수를 배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좀 피곤하더라도 조금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더 많은 시간의 인터뷰를 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 한 인터뷰라면 좀 더 충실하게 기록되는 것이 강교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었을텐데 말이다.
홍세화씨는 강교수를 저작도 많았고, 적도 많았던 볼테르에 비유한 적이 있고, 고종석씨는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가깝게 느껴진다. 유학시절 강교수의 글을 보고 한국인인 것이 덜 부끄러웠다"고 했다. 박노자씨도 비슷한 말을 하면서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보면, 아마 이 말은 강교수가 마당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고하게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정혜신 박사의 '남자 VS 남자'를 보면 이수성 전 총리와 비교해서 이수성에 대해서는 '마당발의 닫힌 연대'로 표현했고, 강교수에 대해서는 '단독자의 열린 고립'이라고 표현했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의 연대가 만남의 유무에 관계없이 얼마나 튼튼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강교수는 "독립은 고독이 아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게 아니다. 인간은 가치를 지향한다. 그래서 독립된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의외로 무서운 것이다. 서로 술 한번 같이 마신 적 없고,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전화 한 통 한 적 없어도 같은 뜻을 나누고 힘을 모을 수 있다. 그래서 독립은 고독이 아니다. 고독하다면 그건 책임의 고독이다. 우리는 책임을 위해선 각자 좀 더 고독해져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김규항씨는 강교수에 대해 "근대화의 기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한국의 작동원리가 되어온 전근대적인 습속을 샅샅이 발견, 근대적인 정신을 마련해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지점에 끊임없는 의견을 낸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강교수가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강교수는 많은 의견을 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거친 분노의 감정을 감출 수 없을 때도 많았다. 홍윤기씨는 "강준만은 타도나 응징이나 적발이 아니라 모욕에 너무 많은 지면을 소모하고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적도 많이 있다.
오마이뉴스에 예전에 실렸던 유시민씨의 인터뷰 후기에는 유시민씨가 인터뷰를 하는 도중 몇 번이나 보수주의자인 양동안 교수, 지만원 박사, 김용갑 의원을 칭찬을 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 이유에 대해 유시민씨는 이렇게 말했다.
"시세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 거 굉장한 미덕이거든요. 우리 지식인 사회는 토론과 관련해서 보면 아주 비겁하죠. 일방적인 프린트 매체에는 온갖 이야기 다 해놓고 책임 있는 자리에 나와서 토론하라고 하면 그냥 무시하잖아요."
이들이 차라리 시세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책임질만한 말은 뱉아내려하지 않는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일 것이다.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위에 나온 부류의 인사들을 소위 골통 보수라고 경멸하면서도 자기 발언을 하지 못하는(욕먹기 싫어서 안하는) 지식인들만 가득찬 세상에서 좀 생각해볼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21세기의 지식인은 사르트르가 지적한 것처럼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하여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미국이야말로 제국주의 국가이며, 불량국가라고 외치면서 미국의 세계지배정책과 지배층에 시비를 거는 촘스키같은 학자야말로 21세기의 지식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지식인이 있느냐라고 내게 묻는다면 강준만 교수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하여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그보다 더 합당한 인물이 있을까? 물론 방법상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손쉽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강교수의 반복되는 얘기가 지겨울 때가 있고, 어떤 글은 유치하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수없이 쏟아내는 모든 글들이 완벽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난 강교수 같은 부류 지식인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서 그들을 공박하는 것으로 자신의 학식과 도덕성을 과시하려는 부류를 약간은 경멸한다.
이 말은 강준만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비판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했을 때' 기득권의 오류에는 관대하거나 무관심했으면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냐는 것이다.
사실 정치인들의 경우 누구든지 욕을 해대고, 욕설을 퍼부어댄다. 그런 사람들 또는 기득권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 폼이 나지 않는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뭔가 새로운 시각의 비판을 해야하고, 그래도 비판을 하려면 어느 정도 거물이어야 하고, 그렇다보니 강준만 교수 같은 사람이 좋은 표적이 되는 것은 아닐까?
강준만 교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가진 수구기득권 세력은 '편가르기'를 절대 눈에 띄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권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에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 세력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파편화돼 있다. 단결은 거의 불가능하게 돼 있다"
사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편가르기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선거행위'조차 사실은 편가르기 아닌가? 문제는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취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 교묘한 속임수를 쓰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강 교수의 말처럼 기득권은 굳이 내세우지 않고도 똘똘 뭉쳐있다. 그런데도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파편화되어, 단결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수구기득권 세력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모래알들에게 단결을 호소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편가르기 담론'이 동원될 수 밖에 없다.
강 교수는 수구기득권 세력은 '편가르기'로 갈등과 분열을 만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고, 일부 어리석은 모래알들은 '맞아, 갈등과 분열은 안좋은거야!'하면서 주춤하거나 물러선다고 말한다. 이때 추상파 지식인들은 '편가르기'를 욕하면서 단결을 호소하는 세력을 비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구기득권 세력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도덕적 권위를 갖고 호통을 쳐대니 수구기득권 세력의 호통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네 많은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추상파 지식인이 아닌가? 본의 아니게 수구 기득권에게 도움을 줘 온 것은 아닌가? 약자를 위한 뜨거운 글쓰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한 비평에만 힘을 써온 것은 아닌가? 정작 강한 것은 비판해 보지도 비판할 의지도 없었으면서, 시세의 유불리를 따져 약자를 공격하고, 대중에게 자신의 학식과 도덕성만을 강조하는데만 힘을 쏟은 것은 아닌가 반문하고 싶다. 난 강교수의 분노와 열정을 사랑한다.
강교수는 현재 한국현대사 산책 80년대편을 쓰고 있다고 했다. 한국현대사를 스무권 분량의 책으로 엮어낼 그 책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고, 단행본 인물과 사상의 경우에는 앞으로 자신은 2∼3편의 글만 쓰고, 나머지는 다른 분들의 글을 받겠다고 밝혔다.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통해 국민들과 지식인들의 정치혐오증을 지적했는데, 이로 인해 민주당 이데올로그로 오해받았던 강 교수는 오마이뉴스 인터뷰 제목에 나온 킹메이커란 표현에 대해서도 '다른 당을 지지하셨던 분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표현은 곤란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은 강준만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