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2

탈세계화와 그 적들

국채라는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서구 경제가 위기를 헤쳐나가며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다. 이제 한 나라, 한 대륙의 명운이 걸린 '특별' 회의나 정상회담은 정치인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난 3년간 정치권은 낙오한 금융계의 뒤치다꺼리를 해왔다. 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고, 벌써부터 이를 둘러싼 공포와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대체 그 누가 탈세계화를 두려하는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단순명료했다. 알랭 맹크 같은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모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성' 아니면 '광기'만 존재했다. 이성을 지닌 이들은 세계화가 행복을 실현하는 길이라 주장했고, 이를 믿을 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세상과 격리해야 할 정신병자로 취급했다. 하지만 '이성'은 내부적 모순에 부딪혔다. 이성은 진실과 논리정연함을 토대로 가장 이상적인 토론을 구현한다고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지난 20년간 모든 대화에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한 뒤에야 비로소 대화의 문을 열려 한다.

는 곧바로 "대대적인 탈세계화 논의가 시작됐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아마 '환영'의 뜻이었겠지만) 이 소식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탈세계화는 어불성설"이라는 내용의 사설 한 편을 서둘러 게재했다. 좀더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할 요량으로, "탈세계화는 반동적"이라는 논지의 대담 기사도 함께 실었다.(1) 분명 탈세계화가 '어불성설'이라는 것과 '반동적'이라는 것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므로, 둘 다 다뤄볼 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위기에 빠지자 비로소 대화 나선 세계화주의자들

거시경제 흐름상 2012년 상반기부터 프랑스도 유럽연합(EU) 차원의 초긴축정책의 여파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위기가 한창인 지금도 고삐 풀린 금융계의 방종과 시장지상주의적 경제정책, 해외이전 등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세계화는 앞으로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결국 진짜 참다운 문제들이 대선 토론의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진짜 참다운 문제, 그러니까 실업, 고용 불안, 양극화, 국민주권 약화 등은 하나같이 세계화라는 문제로 귀결한다. 그렇기에 대안 없는 정권 교체의 종식을 우리는 간단히 '탈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이름은 간단하지만 탈세계화를 둘러싼 논의는 복잡하다. 오늘날 탈세계화에 관한 지적 논쟁은 프랑스의 정치 지형을 뒤바꾸고 있다. 뜻밖의 인물이 기존 주장을 뒤엎고 세계화 논의에서 이탈하는가 하면, 뭔가 진정성이 의심되는 부류가 탈세계화 바람에 편승하기도 한다. '세계화의 진정한 수혜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면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던 이들 말이다. 그들은 과거에는 세계화 논의가 일어나지 않게끔 투쟁을 벌이더니, 이제는 '또 그 얘기'라는 담론이 세계화 논의의 중심이 되도록 투쟁을 벌이고 있다.

기존 논리를 토대로 다시 새로운 세계화 담론을 구상하는 일은 흡사 역사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가장 어리석은 주장(이를테면 어리석다는 특징만으로도 이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행복한 세계화' 같은 주장)에서 알맹이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주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샅샅이 살펴봐야 한다. 오늘날 세계화를 옹호하던 기존 논리가 전부 폐기된 것은 아니다. 최대한으로 살리려면 일단 가지고 있는 실탄은 모두 장전하고 보는 것이 현명하다. 대표적인 예가 1998년 폴 크루그먼의 '세계화는 죄가 없다'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이다.(2) 실제로 그는 '세계화의 적들'을 비난하며 크루그먼을 대놓고 흉내냈다. 그런 그는 오늘날 여전히 세계화 영역에서 금융화만 쏙 빼놓는 용의주도한 태도를 잊지 않는다. 사실 금융화를 옹호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2007년 이후로는 금융화를 비호하기가 한층 더 난처해졌다. 그러니 세계화 논의에서 조심스레 금융화 주제만 빼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일명 '징징 짜는 좌파'가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 수법과 마주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노동자와 연대하는 데 목매고(어쨌든 그들도 좌파이므로), 양극화·고용불안 등의 불행에 뜨거운 눈물로 개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불행을 일으킨 진정한 구조적 원인은 지적하지 않는 수법 말이다. 이를테면 금융 자유화와 주주권력, 자발적으로 금융시장의 요구에 따라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현 EU 통합 체제, '왜곡되지 않은' 자유로운 경쟁 등의 문제에는 침묵한다. 요컨대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인식돼온 이 주제들은 그동안 암묵적으로 이성학파, 좀더 정확히 말해 '이성학파에 속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결코 넘어서서는 안 될 '테두리'를 형성해왔다. 이는 곧 장관과 계속 손을 맞잡고 일하려면, TV에 게스트로 초대받으려면, (좌·우파를 막론한) 여러 정당의 자문관 노릇을 하려면, 한마디로 제도권의 사랑을 받으려면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어들에 반해) 꼭 해야 하는 말들의 '테두리'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는 모든 것을 휩쓸어갔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세간의 조롱뿐이다. 이제 지옥은 타자가 아니라, 과거의 기록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두들 저마다 과거 행적을 지우고 다니느라 아우성이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결코 희생하지 않을 터이니.) 이를테면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생시몽재단', '아이디어 공화국', '테라노바' 등 각종 세계화 옹호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옛날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갈 방도를 강구할 수 없다. 기존에 사용하던 논쟁 방식을 완전히 탈피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교묘히 침묵하는 것은 세계화가 끔찍한 악몽으로 변하기 전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도 세계화 옹호 단체들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그저 '기본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불행한 자의 운명을 개선하려 한다. 이를테면 조세 개혁이나 특히 교육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크루그먼씨! 세계화는 정말 무죄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른바 '상향 평준화된 경쟁력'을 갖추도록 '패자'를 교육하는 것이다. 아, 유럽집행위원회가 그리도 좋아하는 교육,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지식 기반 경제'라니! 고용의 책임은 온전히 바보들에게 떠넘기고, 일자리를 파괴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해 더는 논하지 않아도 되는 얼마나 완벽한 핑곗거리인가. 교육이 제시하는 장밋빛 전망은 또 어떤가? 자고로 밝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당연히 바보들을 교육하는 과정은 더딜 수밖에 없으므로). 다시 말해 당장은 두 손 두 발 다 놓고 있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다. 더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구조적 문제'에 침묵할 수 없다. 세계화로 인한 피해에 세상이 잠잠할 때는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돌연 세계화 병폐를 놓고 세계가 시끄러워진 마당에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기란 불가능하다.

세계화 옹호론자들은 일부 주장을 계속 견지하려 들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이 불행한 것은 세계화가 아닌, 컴퓨터 때문이라며 이른바 '기술' 이론을 들고 나올 것이다. 파스칼 라미도 "과거의 기술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은가?"라고 묻지 않았던가.(3) 다니엘 코엔은 (지식경제 이론에 딱 들어맞는) 이 이론을 부분적으로 계속 견지하며 일자리 파괴, 양극화 등은 세계화가 아닌 기술 진보에 의한 생산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4) 그는 "오로지 우수한 교육을 받은 자만이 컴퓨터 기술을 무기로 굳게 닫힌 취업문을 뚫고 나와, 능력 있는 사람들 몫의 일자리까지 모두 쓸어갈 수 있다. 그러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의아한 사실은 여기서 모두들 세계화와 '생산성'이 서로 상치(세계화와 생산성 가운데 택일해야 하고, 대개는 세계화보다는 생산성을 선택한다)되는 개념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두 사이에 상호보완적 관계, 심지어 인과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무시해버린다. 대체 생산성 증대를 위한 과열 경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바로 '왜곡되지 않은 경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월 100유로짜리 중국 노동자 정도로는 불공정 경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적어도 15유로짜리 아프리카 노동자가 게임에 끼어야 진정한 불공정한 경쟁을 논할 수 있다), 그리고 금융수익 증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가 아니던가? 더욱이 수익 증대는 '주주금융 제국'의 모토이자,(5) 세계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침묵할 수 없다면 이젠 교묘해져라

2008년 경제학자 파트리크 아르튀스는 세계화에 대해 "아직 최악의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다"(6)고 예견했다. 하지만 그도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세계화를 거부하는 것은 미친 짓"(7)이라고 말한다. 별다른 논리적 개연성 없이 그저 희망만 가득한 말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론 지금까지 '그것'은 힘겨운 과정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조금만 더 견디면 곧 '그것'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낡을 대로 낡았지만 새삼 우습게도 오늘날 다시 유행하 는 이 신자유주의 주장에 대해, 어쩌면 지난 15년간 장기간의 예산 축소를 기반으로 한 경쟁적 인플레이션 억제책을 묵묵히 견뎌온 사람들은 크게 감동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는 신세가 아니던가? 물론 중국이 언젠가 내수시장을 책임질 만한 성숙한 임금제도를 갖추고, 수출대국에서 우리 고객으로 변모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대체 언제란 말인가? 10년 뒤? 아니면 15년 뒤? 더욱이 그때까지 버틸 재간은 있는가? 아니면 무작정 곧 보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식의 막연한 인내심만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가? 노동자 임금 150유로짜리 중국이 75유로짜리 베트남에 해외 이전지 자리를 빼앗기듯, 앞으로 세계화가 돌연 아프리카 대륙 쪽으로 기수를 튼다면 그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척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완전한 불모지나 다름없는 아프리카는 앞으로 모든 임금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 분명하다. 그때 가서 또다시 우리는 15년 동안 아프리카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며 마지막 인내심 경연이라도 펼쳐야 하는가?

분명 현 위기로 세계화의 오랜 동맹들은 동요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의 적'이라고까지 선언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과거에 세계화를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는 인상만큼은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그동안 너무 무신경했던 양 연기하며 궤도를 수정하거나(결코 명백한 모순이나 오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진짜 입장을 바꾼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며 저마다 앞다퉈 세계화를 비난할 거리를 하나둘 찾아내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그들은 늘 최소한의 노력에 그칠 뿐이다. 현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적법한 담론' 주위만 빙빙 돌며(이를테면 현 상황에서는 금융계에 좀더 엄격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거기에만 머무르려 한다. 코너에 몰린 다니엘 코엔은 부랴부랴 오랫동안 주주권력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온 사실을 인정했다. 아르튀스도 살릴 수 있는 주장이나마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세계화'(Mondialisation)를 '글로벌화'(Globalisation)와 억지춘양으로 구분짓는 중에도, 어쨌든 일부 비난은 수용하고 있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의 전 경제자문이자 빌 클린턴 정부(1993~2000)에서 적극적으로 탈규제를 옹호한 로런스 서머스마저 "미국 노동자들은 글로벌 경제에 좋은 것이 반드시 그들에게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8)

시스템이 삐거덕거리고, 현실의 통렬한 일격이 반복되면서 마침내 세계화 논의에도 돌파구가 열렸다. 그러자 오랫동안 금기시돼온 주장이 하나둘 터져나왔다. 이제 옹호론자들이 "대체적으로 긍정적"(9)이란 수사학 말고는 비호할 수 없던 세계화 시스템이 영예로운 역사가 아닌 내다버려야 할 역사에 가까워졌다. 경제학자 엘리 코엔은 난처해하며 "오늘날 행복한 세계화라는 담론을 고수하기는 어렵다"고 인정했다.(10) 필리핀의 경제학자 월든 벨로(11)가 원조인 '탈세계화'라는 용어는 세계화가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사회적 분노를 잠재우기에 논리적으로 바람직한 정치적 비전을 의미하는 기표가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현 상황을 '세계화'라 부르기로 쉽게 의견을 모았듯, 현 자본주의 질서와의 단절도 아주 쉽게 '탈세계화'라고 부르기로 의견 일치를 보면 된다.

교육으로 양극화 해결하겠다니

그럼에도 현 자본주의 질서와 '단절'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먼저 아르노 몽트부르(12) 사회당 의원은 유럽통합주의를 기반으로 한 단절 방법을 지향한다(그저 앞으로 독일을 상대로 시장의 요구에 순응하는 현 EU 경제정책 수립 방식이나 유럽중앙은행의 독립성 보장 등을 설득해야 할 그에게 행운을 빌 따름이다). 2005년 '파비우스 효과'(파비우스는 유럽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부결을 주장한 인물이다)와 유사하게, '훌륭한' 정당의 훌륭한 경선 후보자인 몽트부르 의원이 나서면서 세계화 논쟁은 부쩍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결과 그동안 아무도 관심이 없던 담론에 비로소 사람들이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그동안 경제학자 자크 사피르의 주장은 아무도 경청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도저도 모두 실패한다면 그때는 (유로화 탈퇴를 통한) '개별 유럽국 주권 회복'이란 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결코 주저해선 안 된다고 했다.(13)

좌파 사이에 탈세계화 논의가 위축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 소속 경제위원회 위원들이 탈세계화 논의가 확대되는 것을 이토록 경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욱이 개별 유럽국으로 회귀하는 것을 비난하는 말까지 하리라고는 더욱 몰랐다. 이런 비난은 이상하리만치 신자유주의 성향의 언설들이 평상시에 쏟아내던 분노와 닮아 있다. 게다가 이는 "각종 모습으로 위장하고 길을 터가는 극우주의 정책" 발전에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14)

변죽만 울리는 반성…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는 일부 좌파가 의도와는 상관없이 탈세계화 비난에 동참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그들은 가장 왜곡된 형태의 탈세계화를 비난하고 있으며, 사방이 온통 적으로 둘러싸였다는 환상 아래,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른바 '피포위(被包圍) 신드롬'을 왜곡해 견지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북한과 그 '은둔의 왕국' 체제를 세계화와 변증법적으로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의 논객 알렉상드르 아들레르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ATTAC 경제위원회 위원들도 담화문에서 피포위 환상에 사로잡힌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최근의 경제사만 조금 훑어봐도 잘 드러난다.

오늘날의 규범(특이하고 심지어 부적절하기까지 하다)에 비춰볼 때, 전후 포드주의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탈세계화의 특징을 지녔지만, 거기에서 철조망이나 감시탑, 굳게 닫힌 폐쇄적 경제, 자급자족 정책 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포위 이미지는 세상에는 오로지 '세계화된 세계' 아니면 '여러 국가로 이뤄진 지옥'만 존재할 뿐, 그 중간은 없다는 이른바 제3자 특유의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들에게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의 가능성을 환기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생각하는 바, 그러니까 국가가 존재하는 동시에 각 국가 사이에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잘 설명하려면, '인터-내셔널'(나라-사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1945~85년에는 국외 교역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보다 무역이 덜 발전했다고 그것이 흠이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요즘 자유무역에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는 나라가 나타날 때마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분명 '보호주의'라고 불릴 만한 교역으로 전쟁이 일어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일부 대안세계화 지지자들은 라미 사무총장과 똑같은 수사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라미 사무총장의 말을 맹목적으로 해석하며 "관세가 외국인 혐오주의와 국수주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5)

'끔찍한 국수주의적 보호주의가 활개를 친 포드주의 시대'는 어쨌든 완전고용과 성장,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선진국들이 평화롭게 지낸 시대였다는 점을 환기하려 한다. 더욱이 우리가 아는 한 이른바 '세계화된 세상'에서조차 국가라는 원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와 대안세계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는 존재한다. 중국이 있고, 또 미국이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 나라들을 두고 국수주의나 주권 행사 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두 나라에 누군가 확대 통합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일제히 박장대소할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구제불능의 두 나라가 서로, 혹은 각각 우리와 전쟁을 벌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탈세계화, 방법론 놓고 의견 분분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는 한 국가 간의 관계는 단순히 상품 교역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컨테이너나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더라도 예술작품, 학생, 예술가, 학자, 여행객 등의 대대적인 교류까지 저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신자유주의표 세제'가 사람들의 분별력을 깨끗이 씻어버린 현실에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마치 상품 교역이 한 국가의 개방 정도를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악의적인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탈세계화가 '사악한' 교역과 함께 '바람직한' 교역까지 모두 쓸어버리려 한다는 비난이 생겨나는 이 현상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혹자는 ATTAC가 이미 '반세계화'(Antimondialisation)라는 초기 이름표를 서둘러 떼어내고 '대안세계화'(Altermondialisation)라는 좀더 명확한 명칭으로 조직의 정체성을 재규정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이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이론 사이에 그들의 이론을 구별짓는 기준이 될지 모른다. 이를테면 ATTAC 경제위원회 위원들은 담화문에서 끊임없이 "계급투쟁이 국가 간 투쟁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16)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이 주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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