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5

[사설] 시민들은 투표 거부로 오세훈 시장을 심판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밥상을 볼모로 잡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여온 정치적 도박은 결국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서울시 유권자의 4분의 3에 가까운 620여만명이 대거 투표에 불참함으로써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싱겁게 막을 내렸다. 오 시장이 눈물을 흘리면서 벌인 '표 구걸 퍼포먼스'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시민들은 '나쁜 투표'를 냉정히 외면했다.

투표율이 고작 25%대에 머문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투표 기피 심리 이상의 것이다. 이는 정당성 없는 투표에 대한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거부의 몸짓이며, '복지 포퓰리즘과의 전쟁' 따위의 허황된 구호에 대한 차가운 비웃음이다. 이번 투표 결과는 '아이들의 무상급식을 굳이 발벗고 나서서 반대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유권자들의 보편적 정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 시장이 패배한 것은 야당과 시민단체의 투표거부 운동 등 외부적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릇된 정치적 욕심, 일부 보수세력의 칭찬에 휘둘린 우쭐함, 주변과 소통하지 않는 오만과 독선, 자기절제의 결여로 스스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서울시민들은 이런 오 시장에 대해 투표 거부를 통해 명백한 불신임 판정을 내렸다.

오 시장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 시장직에서 물러나야겠지만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자리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시정 혼란만 더해지기 때문이다. 10월 보궐선거를 피하기 위해 9월 국회 국정감사까지는 시장직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따위의 꼼수는 부리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스스로를 두 번 죽이는 어리석은 행위다.

이번 주민투표는 오 시장의 패배를 넘어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패배이기도 하다. 특히 청와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복지병' 운운하며 보편적 복지를 비판함으로써 오 시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정치권 한쪽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여권내 대선주자 관리를 위해 은근히 오 시장을 부추긴 게 아닌가 하는 관측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홍준표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 역시 오 시장을 적극적으로 말리기는커녕 중앙당 차원의 지원 결정을 내리는 등 잘못된 선택을 거듭했다.

문제는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이번 주민투표의 의미와 교훈을 제대로 깨닫고 있느냐는 점이다. 주민투표에서 확인된 민심은 분명하다. 무조건적인 편가르식 복지 논쟁은 신물이 난다는 하소연이자, 포퓰리즘이니 망국병이니 하는 따위의 딱지 붙이기 경쟁을 이제는 제발 멈추라는 명령이다.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은 이미 복지의 전면적 확대가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심각한 양극화와 이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여권은 더는 불필요한 복지병 논쟁을 부추기지 말고 제대로 된 복지정책을 내놓는 데 힘을 쏟기 바란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어제 투표 결과를 놓고 "국민의 뜻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비긴 것"이라는 등의 주장을 내놓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미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상황 인식으로는 주민투표 패배 이후 밀어닥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은 민주당 등 야권도 마찬가지다. 투표 결과에 고무돼 우쭐하거나 오 시장 사퇴로 차려질 정치적 밥상에만 정신을 팔 경우 역시 호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무상급식으로 촉발된 보편적 복지 의제를 어떻게 제대로 확산시켜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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