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7

[한겨레 프리즘] 안철수, 정치를 하려면… / 임석규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이번주 미국에서 가족과 휴가를 보내고 있다. 모처럼 홀가분한 시간이 정치 참여 여부를 결단하는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대체로 공적 가치를 중시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정치는 공적 가치를 최대치로 구현할 수 있는 영역이다. 정치의 이런 치명적 유혹을 그가 끝내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

안철수는 이미 현실 정치의 중심부에 진입해 있다. 박근혜 대세론을 단숨에 제압한 그 힘을 허비하지 말라는 게 지지자들의 요구다. 이젠 하기 싫다고, 정치가 체질에 안 맞는다고 함부로 처신할 수 없는 처지다. 국민은 이미 그를 유력 대선주자로 등에 태워 질주하고 있다.

안철수는 자신을 대체할 다른 대안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현 집권세력이 정치적 확장성을 갖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되는 건 못 봐주겠다는 얘기다. 안철수가 나서지 않으려면 박근혜를 꺾을 다른 야권 주자가 나타나야 한다. 그게 현재로선 무망하다.

안철수의 위력은 지지율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진보적으로 꼽힌 대선주자는 안철수였다. 61%가 그를 진보적 인물로 인식했다. 17대 대선을 1년쯤 앞둔 2006년 11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여론조사에서 가장 진보적으로 꼽힌 대선주자는 이명박이었다. 당시 이명박이 진보에 가깝다는 응답이 54.7%로 김근태(42.1%)보다도 많았다. 이명박과 안철수에 투영된 진보 이미지는 이념이 아니라 '바꿈'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바꿔줄 것이란 대중적 믿음만큼 강력한 정치적 파워는 없다. 이명박도 그 힘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은 다시 안철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안철수는 정치 초보다. 준비되지 않은 대선주자다. 그가 대선판에 뛰어드는 건 수영 초보자가 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심해 속으로 다이빙하는 것처럼 무모한 것일 수 있다. 느닷없이 1위로 솟구치더니 꺼질 줄 모르는 지지율은 이 정치 초보자에게 오히려 부담스러울 것이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들쑤실 것이다. 그러니 그가 몸이 으스러지도록 고민하는 게 맞다.

그가 각 분야 학자들을 만나 공부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정치를 다 갖춰서 할 수는 없다. 분야별 지식의 정도가 좋은 대통령의 척도는 아니다. 정치 9단이 정치 초보자보다 정치를 더 잘한다고 볼 수 없다는 증거가 바로 '안철수 현상' 아닌가. 그는 기업을 경영하며 '핵심 가치와 비전'을 고민했던 사람이다. 정치도 가치와 비전으로 승부해야 힘이 있다는 걸 그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의 진짜 고민은 실존적 영역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지난 8일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인천공항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열정을 갖고 균형을 잡으면서 계속 (정치를) 해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 막스 베버의 를 읽었나 보다. 이 책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영혼의 맑음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정치는 모질고 고통스러운 '불인'(不仁)의 영역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뒤 쓴 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다"며 "정치, 하지 마라"고 말렸다. 안철수가 현실 정치에 발디디는 순간 온갖 모멸적 공격이 휘몰아칠 것이다. 정치하려면 시대의 요구와 자신의 소명을 일치시키면서도 정치의 비열함에 흔들리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을 바꿔달라는 기대에 부응하려면 그 자신이 정치적으로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

임석규 정치팀장 sky@hani.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