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5

[송희영 칼럼] 뜬구름 위의 재벌 총수들

대한상의·전경련·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경영자총협회 등 5개 경제단체가 모처럼 한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22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인기 영합하는 공약 남발과 기업 때리기를 자제하라고 요구했다. 대기업을 패고 물어뜯어야 표를 얻는 선거철에 기업인들의 불편한 심사를 정치권에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계를 단결시킨 것은 포퓰리즘 공약을 견제하려는 명분만은 아니다. 핏발 선 눈으로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일삼던 1980년대 운동권 용사들이 30명 넘게 다음 국회에 진출할지 모른다는 어림짐작이 그들을 긴장시켰다.

"1980~90년대 그들은 현장에서 잠복 상태로 투쟁했지만, 앞으로는 국회라는 링 위에서 공개전투로 전환하겠다는 것 같다. 당시 위장취업했던 인물들, 배후에서 투쟁이론을 교육했던 인물들이 정치권에 대거 출현했다. 이번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운동권이 있다면 정치와는 담을 쌓은 사람들뿐일 것이다."

어느 기업인이 야권의 단일화된 후보들과 비례대표 명단을 훑어본 후 내놓은 진단이다. 한국노총은 민주통합당과 손잡았다.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을 통해 야권 연대에서 넓은 터를 확보했다. 노동계는 모두 야권(野圈)으로 뭉쳤다.

강성(强性) 노동운동가들이 여럿 당선 되면 다음 국회에서 비정규직과 노동법 개정을 둘러싸고 일대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자명해졌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기업인 출신 후보를 거의 내세우지 않았다. 재계로서는 정치권에서 지원군마저 찾기 힘든 처지다.

정치판을 볼 줄 아는 기업인이라면 재벌 총수를 비판하는 말, 대기업을 성토하는 확성기 소음에 귀를 막았던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할 것이다. 골목 수퍼의 배달 아저씨가 재벌을 향해 쌍스러운 욕을 내뱉을 때 "우리 백성은 사촌이 땅 사는 것도 배 아파 못 견딘다"며 국민성을 탓했던 말도 지우고 싶을 것이다. 제빵 재벌에 밀려 오피스텔 코너의 빵집을 문닫은 '삼순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던 일도 당장 과거로 되돌리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올 것이 왔다'는 위기의식이 경제계 전체에 널리 퍼진 것은 아니다. 오너 가족들은 여전히 배부른 상속을 둘러싼 소송으로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TV·냉장고부터 라면·교복까지 소비자를 골탕먹이는 담합은 끊이지 않는다. 안 팔리는 골프 회원권을 하도급회사에 강매하고, 회삿돈 수십억원으로 유명 화가의 그림을 사들여 자기 집 거실에 걸어놓는 회장님의 악취미도 건재하다.

공격의 빌미를 스스로 헌납하는 기업인은 너무 많다. 재벌 비판이 상종가를 칠 때면 재벌 총수와 그 가족들의 추문은 덩달아 솟아나온다. 20년 전만 해도 창업자 총수들은 오늘처럼 오만하지 않았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창업자도 은행장을 만나려고 한 시간 넘게 은행장실 문고리가 흔들리기를 기다리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원들과 맨몸으로 씨름하고 포장마차에서 폭탄주를 돌리던 사장님도 적지 않았다.

지금 2세, 3세 총수에게는 누구도 쓴소리를 할 수 없다. 재벌 총수 사무실은 싫은 소리가 금지된 치외법권(治外法權) 구역으로 성역화됐다. 과거에 돈줄을 쥐었다 풀어주며 견제하던 은행도 "여유자금을 예금해달라"고 거꾸로 매달리는 형편으로 바뀌었다. 사장들마저 총수 따라서 거만해졌고, 임금 협상을 경영진에게 일임하지 않는 노조에게 "우리 노조는 변태(變態) 아니냐"며 모욕을 준다. FTA로 알짜 이득을 챙길 수출기업의 청년 사원들은 반(反)FTA 정서에 물들어가건만, "당신들 월급은 5할 이상이 무역에서 얻어지는 선물"이라며 설득할 생각조차 없다.

재벌 총수는 회사 통장에 수조(兆)원의 잉여금을 쌓아놓고도 연봉과 복지를 묶어놓은 채 "미래를 위해 비축해 놓자"는 말만 해마다 똑같이 반복한다. 그럴수록 젊은 사원들은 인터넷에서 삐딱한 '콘서트'에 심취해가고, 회사 등산대회에는 몸살을 핑계로 빠지면서 자기들끼리 동료의식을 확인하는 모임에는 개근한다. 중간 간부들은 상하 간 의사통로가 되지 못한 채 '명퇴' '권고사직'이란 단어를 겁내며 윗분의 지시와 하명(下命)에 비굴해졌다. 총수와 사원들 간의 거리는 지구와 태양만큼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경영진과 사원들이 터놓고 대화하는 콘서트가 열리기는 커녕 다가설 수 없는 넓은 DMZ(비무장지대)가 형성됐다.

회사 안에서 불통(不通)인데 회사 밖 사회나 정치권과 통할 리 없다. 다음 국회에서 과격 노동운동가들이 총수를 골탕먹이고 회사를 도산시킬지 모를 위기로 몰고 가더라도 내 편이 되어줄 응원세력을 회사 안에서조차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 총수들은 정치권의 좌경화를 걱정하기 앞서 자기 발밑에서 폭발할 지뢰밭부터 살펴봐야 한다.

/송희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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