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3

[한겨레 프리즘] 자유 / 김진철

오랜만에 이념 논쟁이 불붙었다. 논쟁의 주인공은 '자유'다. 이 자유로운 나라에서 민주주의에 자유를 붙이는 게 옳으냐 그르냐를 두고 벌어진 싸움이다.

이 나라는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에 물대포를 쏠 자유가 경찰에게 보장돼 있다. 아울러 이 자유 대한민국에서는 국가보안법 입건자가 매년 100명을 넘어설 정도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시민들에게 주어진 나라다. 뿐만 아니라,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다룬 티브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방송피디는 법정에 서고, 그림 잘 그리는 시민이 길거리에 쥐새끼 그림 좀 그렸다고 기소되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가 힘을 잃은 터에 웅변되는 자유의 목소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웅변가들의 얄팍한 면모에서 심중이 드러난다. 어느 국회의원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면 북한에 가서 국회의원 하라"고 했다. 시위나 양심, 사상의 자유가 처참히 훼손될 때 어디서 뭐 하고 있었는지 모를 교수·학자들도 신문 지상에 대거 등판했다. 누구의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안보와 공공질서를 자유 위에 올려놓던 그들이 왜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여야 하는지 핏대를 세운다.

자유민주주의의 웅변장 한켠에는 '민주'가 숨죽이고 있다.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한푼 두푼 모은 서민의 돈이, 부자들의 돈뭉치 앞에서 업신여김 당했다. 한푼 두푼 모은 서민들의 푼돈들은 1500억원 상상할 수 없는 목돈이 되어 폭력배들의 배를 불렸다. 강남 유흥가의 빛 한번 목도하지 못한 서민들의 피땀 어린 돈이 환락의 밤을 수놓는 조폭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가난한 이의 몇푼 대출에 까다로운 은행가들의 잣대는 부자 폭력배들이 돈을 떼어먹을 땐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서민들은 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제 집을 뉴타운에 빼앗길 절망 속에서 어떤 이는 독극물을 삼켜 세상과 이별했다. 뉴타운 광풍 속에 작은 집 한칸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이들은 제 몸에 불을 붙이려 했다. 재벌 건설사들은 뉴타운에서 사람 대신 수익을 지켜볼 뿐이다. 정부는 뉴타운에서 사람 대신 건설사들을 목도할 뿐이다. 뉴타운의 장밋빛 꿈은 서민들의 것이 아니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말 못하는 어린 학생들을 성적으로 유린하고도 떳떳하게 대낮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는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다. 사기꾼과 폭력배들이 나라의 주인 된 까닭은 권력을 쥔 협잡꾼들 탓이다. 최고권력자 곁에서 호가호위해온 이들은 서민들이 사기당한 돈을 우습지도 않게 집어삼켰다. 사기꾼의 허점을 이용하는 협잡꾼은 그 스스로 폭력배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폭력배들이 활개치는 무법의 거리를 방관했다. 그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협잡꾼과 폭력배와 사기꾼들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죽은 시인은 아무래도 통탄의 마음으로 울부짖고 있을 듯하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김수영 '푸른하늘을') 협잡과 폭력과 사기가 주인 된 세상에서 자유를 외치는 이들의 심중을 시인은 정확히 간파하고 있건만, 그들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피와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민주주의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김남주 '자유')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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