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3

[고종석 칼럼] 빈소에서

지인 어머님의 빈소(殯所)에 왔다. 빈소는 성찰의 자리다. 이곳은 죽음의 터, 어떤 실존의 마지막 공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사태의, 죽음이라는 말의 궂음을 지우려고 술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어도, 조문객의 마음 한구석에선 짙든 옅든 반구(反求)의 기(氣)가 피어오른다.

천문학적 지질학적 시간을 심중에 둘 때, 우리 행성에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극히 최근 일이다. 그리고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한 우리들의 맹목적 집착과 '어머니-지구'에 대한 매정함을 생각하면, 인류가 사라질 날도 아주 멀어 보이진 않는다. 이것은 생태근본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납득할 만한 예측이다.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부른 이 행성에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 이래, 우리 인류는 얼마나 고귀해졌을까? 어느 조문객이 놓고 갔을 신문에는 '도가니'가, '성추행 의대생'이, '후쿠시마의 플루토늄'이, '저축은행 사태'가, 'MB,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 찍혀 있다. 이런 뉴스들의 공통점은 호모 사피엔스의 비천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때, 인류에게 거룩한 공간이 있었다. 예컨대 교회. 설령 인격신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곳에선 마음의 안식을 얻고 잠시라도 제 비천함을 씻어낼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영혼'을 사고파는 시장이다. 그 규모가 무기 시장이나 마약 시장 못지않을 테다. 종교가 돈벌이 수단이 된 것이 타락한 성직자들 탓만은 아니다. 그 '영혼 상인들'을 따르는 소위 '성도'(聖徒)들의 어리석음과 치졸한 이기심이 아니라면, 교회가 기업으로 어찌 존속할 수 있으랴. 그 '성도들'의 믿음도 사실 믿을 게 못 된다. 전능하고 선한 신의 존재를 그들이 굳게 믿는다면, 우리 창백한 푸른 점이 이리도 스산하고 누추하게 응축돼 있지는 않으리라.

법원도 한때는 성스러웠다. 인간의 법정은 하느님 법정의 축소판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오늘날 재판정에는 그런 거룩한 기운이 없다. 판사가 걸친 법복은 신성함을 가장하기에 너무 얇다. 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자리가 아니라, 진실을 덮는 기술의 경연장이다. 더 유능한 기술자를 사기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또는 더 많은 권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건희씨의 옥살이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시민계급의 등장과 함께 태어난 신문은, 비록 신성한 공간은 아닐지라도, 한때 공정한 공간이라 여겨졌다. 재판정 바깥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공간이라 간주됐다. 오늘날 그리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문은 어떤 정파를, 특정 계급을, 궁극적으로 자본을 대변한다. 방송이나 소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다를 바 없다. 별난 일도 아니다. 최초의 정기간행물이라는 17세기의 (Journal des Savants)이든 요즘 젊은이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든,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은 '비천한 우리들', 인간이기 때문이다. 올드미디어든 뉴미디어든, 그곳은 소통의 공간이라기보다 인간 욕망의 싸움터다. 미디어 인간은 자신 또는 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싸울아비들이다.

인간은 본디 세속적이다. 사실 '인간'이라는 말의 구식 용법을 따르면, 이것은 아무런 정보도 늘리지 못하는 분석명제다. '사람과 사람 사이'(人間)가 곧 세속이니 말이다. 그런 한편, 인간의 마음 한구석에는 성스러움을 찾는 본능이 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보며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들 각자는 우주 한 끝의 창백한 푸른 점에 찍힌 극미(極微)의 점일 뿐인 것을. 그러나 이제 성스러운 곳은 없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승리는 이 행성에서 거룩함을 없애버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비록 상조 회사들의 상혼으로 더러 어지럽긴 하지만, 빈소가 그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성소인 듯하다.

아무렇거나 낙관주의는 생명체의 운명이자 의무다. 우리는 지상에 결코 낙원을 건설할 수 없겠지만,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누군가가 "진실은 진실화 과정"이라고 말했듯, 낙원은 낙원을 향한 도정이다. 그 연대와 사랑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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