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01

[야! 한국사회] 두어 가지 함정 / 김규항

'어떻게 하면 아이와 잘 소통할 수 있는가?' 부모들(이라고 적지만 엄마들. 한국의 아빠들은 교육의 실제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강연을 하면 꼭 나오는 질문이다. 내 교육 강연이라는 게 '성적 올리기 비법' 따위와는 동떨어진,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교육 현실을 넘어서는 일과 관련한 이야기들이라 청중들도 교육 문제에 대해 시류를 거스르는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많다. 질문은 대개 내 글에 적힌 아이와의 소통 이야기를 근거로 한다. 물론 사실을 가감 없이 적은 것이지만 나 역시 아이와의 소통에서 실수할 때가 있고 '망설이지 않고 사과하기'를 나름의 보완책으로 삼는 처지다. 어쨌거나 그간의 내 체험과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며 느낀 걸 적어본다. 이른바 '민주적인 부모가 아이와 소통에서 빠지기 쉬운 두어 가지 함정'.

첫째 함정은 이른바 민주주의의 절차와 내용의 괴리다. 민주적인 부모들은 당연히 아이와 소통도 민주적으로 하려 애쓰는 편이다. 문제는 이 민주적인 소통이 절차만 민주적인 경우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바람직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는 그 결론으로 대화를 몰고 가는 것이다. 소통의 권위와 논리적 능력에서 부모는 아이를 압도하기 때문에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니, 부러 제어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 즉 민주주의의 절차는 회복했으되 여전히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빼앗기고 억압받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닮은 데가 있다.

둘째 함정은 아이가 판단하고 선택할 만한 정보나 식견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의 의견을 무작정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은 아이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제 교양이나 사회의식을 아이에게 대상화하는 자기애적 행동인데 생각보다 해악이 크다. 이를테면 내 친구 녀석은 교육 현실에 관한 신문 칼럼에 엄청 감흥을 받은 어느 날 밤 제 초등학교 오학년 아들을 앉혀놓고는 '피시방 가는 시간 자율적으로 할 수 있지?'라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라면 또 모를까 남자아이가 '할 수 있다'고 하지 '하기 어렵다' 하겠는가. '아이가 이상해졌어!' 석 달 후 녀석의 집에선 소란이 벌어졌다. 석 달 동안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센 게임만 해댄 아이가 결국 사고와 인지 능력의 위기를 맞았던 것.

두 함정은 언뜻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첫째를 피하려면 둘째로 빠질 것 같고 둘째를 피하자니 첫째로 흐를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향하거나 시도하되 정작 민주주의의 주인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결국 둘은 하나다. 민주적인 부모 노릇은 권위적인 부모 노릇보다 훨씬 어렵다. 권위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어버이연합 수준의 패악 질을 일삼는 경우만 아니라면) 자연스레 부모와의 차이에 적응하게 되지만, 민주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워낙 가르치고 설파한 게 있어놔서 '남들 앞에선 훌륭한 체하면서 실제론' 하며 크게 상처받기 십상이다. 상처는 진보적인 어른들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아이의 사회의식 형성에 장애를 일으킨다.

두 번의 민주정권이 기대와는 달리 인민들을 배제하는 정치로 일관하여 결국 인민들로 하여금 이명박 정권을 불러들이게 만든 상황은 민주적인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 직면한 상황이기도 한 셈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사회적 소통이든 아이와의 소통이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존경이 살아 숨쉬려면 민주주의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늘 되새겨져야 한다. 다짐의 마음으로 모질게 말하자면, 주인이 빠진 민주주의는 좀더 교활한 방식의 독재일 뿐이다. 지금 여기, 민주주의의 주인은 누구인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