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사 연구자 허버트 빅스의 (오현숙 옮김, 삼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국의 오키나와 보유를 일본인들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키나와인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은 패전국 일본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다. 1947년 당시 맥아더의 정치고문이 윌리엄 시볼드였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 '독도 문제'를 만들어낸 장본인 중 하나다. 독도는 일본 패전을 전후해서 연합국들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할 때 당연히 조선 땅이었고, 그래서 조선으로 반환되게 돼 있었다. 그런데 해군장교 출신의 이 시볼드가 자신의 상급자인 조지 애치슨이 1947년 3월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직후 그 대신 맥아더 정치고문 겸 연합군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직무대리가 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친일파요 반공주의자였던 시볼드는 전후 처리 때 대만에 대해서도, 중국에 반환하기로 약속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 등을 무시하고 '주민투표에 의한 신탁통치' 주장을 들고 나왔다. 중국에 넘겨주기 싫었던 것이다. 시볼드는 장차 미국의 동아시아 근거지가 될 일본의 위세를 회복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류큐제도(오키나와) 귀속 문제도 패전 일본의 전후 영토처리 대상이었다. 오키나와도 본래 일본 땅이 아니었다. 오키나와가 일본령이 된 것은 메이지 유신 11년 뒤인 1879년이다. 결국 오키나와를 차지한 미국은 1972년에야 그 섬들을 반환하는데, 옛 주인인 류큐 주민이 아니라 일본에 넘겨줬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유지를 일본이 보장해줬으니까. 천황 히로히토가 그 일에 앞장섰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귀속된 지 26년이 지난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시마네현 땅으로 슬쩍 바꿔치기했다. 이른바 '보호조약'이 체결돼 사실상의 식민지가 된 조선 조정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맥아더의 정치고문 시볼드는 1951년에 체결된 대일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을 만들 때 이렇게 주장한다. "리앙쿠르암(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재고를 요청함. 이들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된 것이며 유효한 것으로 보임. 상상컨대 안보적 고려에서 볼 때 그곳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상정해볼 수 있음." 근거자료가 하나도 없는 이런 주장이 그 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때 내세우는 유력한 근거의 하나가 됐다. 1949년 12월29일자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초안이 이에 따라 독도를 일본령이라 표기했다. 초안은 여러번 바뀌는데, 독도가 일본 땅으로 표기된 건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 미국은 전쟁중인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고 일본과 한국의 국교정상화를 종용하기 위해(이미 그때부터!) 조약 초안에서 논란거리인 독도 귀속 문제를 아예 빼버린 채 그 문제를 얼버무렸다. 그리고 일본을 달래기 위해, 애초 전승국 일원으로 조약에 서명하기로 돼 있던 한국을 명단에서 빼버렸다. 미국의 이런 기회주의적인 처신 때문에 조선 땅이었던 독도는 공중에 떠버렸고 일본은 그걸 근거로 계속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있다. 탁월한 독도 문제 연구자 정병준의 에 그 전말이 자세히 나와 있다. 한승동 논설위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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