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국가신용등급 '트리플A'(Aaa) 국가가 모두 사라진다?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현재 21~24개 국가신용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인 트리플A 국가는 모두 16개국.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3개국 외에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룩셈부르크, 핀란드 등 유럽 11개국과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2개국이다. 3대 국제신용평가회사가 평가한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무디스와 피치가 다섯번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스앤피)의 경우 여섯번째 등급이다.( 참조)
국가신용등급(장기외화채권에 대한 소버린 크레디트 레이팅)은 한 나라가 채무를 이행할 '능력과 의사'가 얼마나 있는지를 등급으로 표시한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그 정부의 미래 채무상환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채무상환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로 다양한 변수들이 고려되어 등급이 결정된다. 재정건전성과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정치적 안정 여부 및 채무상환 의지 등 계량화가 어려운 지표들도 고려 대상에 포함된다. 계량화가 가능한 지표들일지라도 지표들의 상대적인 가중치를 신용평가회사들이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다, 미래의 채무상환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므로 신용등급의 결정에 주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외부에서 국가신용등급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국가신용등급 결정의 주요 경제변수들이 악화되면서 투자부적격 수준까지 떨어졌으나, 무디스는 지난해 4월 외환위기 이전 수준인 다섯번째(A1) 등급으로 올렸다. 무디스의 등급은 12년 만에 복귀했지만 에스앤피의 경우는 외환위기 이전보다 여전히 2등급 낮은 단계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는 세계 국가신용등급의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선진국과 신흥개도국의 국가신용등급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과 충격의 여파가 직접적으로 나타난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의 국가신용등급이 급격히 하향조정되는 반면 일부 아시아와 중남미 신흥개도국의 등급은 상향조정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분기 중 세계 국가신용등급 변동을 살펴보면 의외로 상향조정 건수가 하향조정 건수보다 많았다. 그러나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쏠림현상이 뚜렷했다. 상향조정된 18개 국가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양호한 재정건전성을 바탕으로 금융위기의 충격을 벗어난 아시아 및 중남미 신흥개도국들이었다. 반면에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키프로스 등 10개 선진국의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되었다.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 주요 선진국은 아직 등급이 조정되지는 않았지만 '부정적 관찰대상(Watch)'이 부여되었다. 선진경제의 3대 축인 미국-일본-유럽이 국가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이 높은 불안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경우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키프로스 신용등급이 크게 하향조정된 가운데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도 재정악화와 성장률 저하뿐 아니라 애초 예상을 뛰어넘는 지진과 원전 피해 등으로 지난 2분기 3대 신용평가사 모두 신용전망을 하향조정했다. 미국은 최근 논의되고 있는 부채한도 증액 합의에 성공하더라도 장기적 재정적자 감축 계획이 마련되지 못할 경우 중기적으로 국가신용등급이 트리플A 국가에서 제외될 위험에 처해 있다.
미국이 트리플A 국가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현시점에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국제경제사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규모와 기축통화국이라는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이점을 바탕으로 수십년간 세계 국가신용등급의 표준으로 군림해 왔다. 이런 미국의 위상이 허물어지는 것을 국가신용등급의 하락이 웅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세계 국가신용등급의 표준인 미국의 등급 하락은 현재 트리플A 국가들의 연쇄 등급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축통화국인 미국보다 채무상환능력이 우월한 국가가 존재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가신용등급은 '해당 경제 내에서 외화표시 채권 발행에 대해 어떤 경제주체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신용등급'을 의미한다. 개별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신용평가도 해당 국가의 신용등급을 토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 우량기업도 결국엔 좋은 신용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신용등급의 하락은 국가의 신인도 하락뿐 아니라 민간의 국외 차입비용 증가와 투자여건 악화로 이어진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을 이야기해 왔던 일부 전문가들의 전망이 현실화할 시점이 멀지 않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인 우리나라도 다방면의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송태정/우리금융지주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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