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회의장의 법률상 권한이 가장 막강했던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유신시대였다. 1973년 국회법이 전면 개정돼 상임위와 의석의 배정은 물론 의사일정을 맘대로 변경할 수 있는 권한까지 모두 국회의장에게 줬다. 대통령의 충실한 거수기 노릇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화로 국회 기능이 정상화하면서부터 의장의 권한을 대폭 줄여 대부분 교섭단체 대표나 국회 운영위와 '협의'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국회의장은 여전히 대통령에 이어 의전서열 2위일 뿐 아니라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건을 직권상정할 수 있는 권한과 경호권 발동 등 질서유지권도 갖고 있다.
민주화 이후 국회의 위상은 전에 비해 높아졌으나, 여야의 대결정치가 계속되는 바람에 의장은 '날치기'의 악역을 떠맡는 일이 많았다. 국회 의안과에 따르면, 제헌국회 이래 어제까지 모두 23건의 국회의장 불신임안이나 사퇴촉구 결의안이 제출됐다고 한다. 역대 국회의장이 모두 22명이니 한 사람당 한 번꼴로 사퇴 요구에 몰린 셈이다.
박희태 현 의장은 여러 부문에서 기록을 세우고 있다. 재임중 비리에 연루돼 검찰 수사 대상이 된 첫 의장일 뿐 아니라 의장 부속실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한 것도, 여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사퇴요구를 받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박 의장이 엊그제 귀국하면서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관련설을 부인했다. 기자회견에서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서 소정의 책임을 지겠다"면서도 돈봉투 살포 여부에 대해선 "4년 전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다"고 발뺌했다. 검찰에서 부인하면 책임질 일도 없을 것이라는 전략이니, 결국 끝까지 사퇴하지 않고 버티겠다는 얘기다.
이러다 혹시 여야 의원들에 의해 국회의장이 쫓겨나는 새 기록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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