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영화 을 봤다. 사법부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에다 적은 스크린 수에도 불구하고 박스오피스 2위가 당연할 만큼 흥미진진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탄탄했고, 정지영 감독의 연출력은 뛰어났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사법부에 '똥침'을 날렸다. 그런데도 다른 관객들처럼 후련함을 만끽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영화와 관련된 한 사람과 영화 속 대사 한마디 때문이었다.
먼저 한 사람, 서형 작가. 영화 제작자들이 엔딩 크레디트에서 각별히 고마움을 표시한 이다. 그는 영화의 소재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석궁 사건과 재판 과정을 다룬 책 을 2009년 6월에 낸 여성 르포작가다. '서형'은 필명으로, 영화 개봉 뒤에야 그는 얼굴을 드러냈다.
작가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인터뷰가 자신의 일이라고 소개한다. 우리나라 3대 권력기관(청와대, 국회, 대법원) 앞의 1인시위자들을 인터뷰하다 김 교수의 사연을 접했다. 인권 사각지대의 장애 학생들을 다룬 영화 와 견주면 소설 를 쓴 작가 공지영에 해당될 사람이 그다.
서형과는 작은 인연이 있다. 책이 나오기 전인 2009년 초,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책 쓰는 일에 도움을 청했다. 2008년 석궁 사건을 주제로 내가 쓴 글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취재한 다른 기자를 소개해 준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뭔가 의심스럽고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전화를 받을 무렵 석궁 사건은 내게 '완료형'이자 '과거형'일 뿐이었다. 그러나 3년이 흐른 지금 석궁 사건은 영화를 통해 둔중한 울림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귓전을 때린 주인공의 한마디 "기자들을 너무 믿지마". 영화에는 김 교수 사건을 취재하는 한 열성 여기자를 비롯해 많은 기자들이 등장한다. '요즘도 이런 기자가 있나' 싶을 만큼 여기자는 집요하게 사건을 쫓는다. 하지만 결국 다른 출입처로 전출된다. 그의 부서장은 전출 이유를 속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 한 방송사의 기자는 사건을 다룬 프로그램의 방영을 자신하지만 결론은 방영 보류다. 영화에서 언론은 사법부 판단 너머에 있을지 모르는 '실체적 진실'을 추적하는 존재가 더 이상 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을 예견한 듯 주인공은 변호사와 가족에게 "기자들을 너무 믿지 마"라고 소리친다.
영화 밖의 현실은 김 교수의 외침과 다르다고 반박하기 어렵다. 확실히 지금 '제도권 언론'은 영화 속 언론과 흡사하다. 사법부든, 정치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힘 있는 자'의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해 있다. 김 교수처럼 외롭게 정의로운 싸움을 벌이는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비비케이(BBK) 사건'이나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비리'처럼 사법부가 판단을 내렸지만 실체가 여전히 흐릿한 의혹은 많다. 이런 사건의 진실을 언론이 추적하지 못한다면 그 역할은 또다른 서형이나 공지영, 정지영이 맡게 될 게 뻔하다.
흔히들 언론이 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같은 언론의 외부 환경이 거론된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언론이 정보와 진실을 독점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지만 '낡은 언론'의 위기의 싹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더 크게 자라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언론은 문제의식과 도전정신을 잃고 있다. 언론사는 이익이 우선인 기업을 닮아가고, 언론인은 월급쟁이 생활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이런 언론에 더는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이 겨냥한 것은 일그러진 대한민국 사법부만이 아니다. 제 본분을 잃은 언론과 언론인 또한 과녁이다. 나를 포함해.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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