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조선시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슈마다 발을 담그는 '백과전서파' 논객의 사회사… 금기에 얽매이지 않고 '김일성 만세'까지 썼던 김수영 시인 정도가 진중권과 유사해
진중권의 '기풍'(棋風)을 따지고 든다면 뭐라 할 수 있을까. 주변의 잔잔한 실리를 버리고 중원으로 곧장 육박하는 장면에서 '우주류'(宇宙流)의 행마가 엿보인다. 확실히, 난폭하지 않은 평이한 수로 반상을 이끄는 '평명류'(平明流)는 아니다. 반상을 두껍게 가져간다는 느낌은 크지 않지만 그렇다고 화려하기만 할까. 그는 보기 좋은 것을 챙기기보다는 처절하리만치 실리를 챙기고 승리에 집착하는 승부사형에 가깝다. 황우석·심형래·곽노현, 웬만한 큰 승부에서 지지 않는다. '반집승' 같은 신승은 없다. 대부분 상대방이 먼저 나자빠지는 불계승이다. 진중권은 여러 개의 접시를 동시에 돌린다. 진득하게 하나의 판에서 고기를 굽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여러 판에서 여러 수를 동시에 생각한다. 하나의 판에서 여러 명과 맞붙기도 한다. 다면기(多面棋)를 두는 셈이다. 자신의 판이 아닌데도 이슈마다 발을 담근다. 없는 이슈도 스스로 만들어내며 승부를 내고 마는 '백과전서파 논객'이다.
조정과 편지, 논쟁의 통로
백과전서파 논객의 비조는 누구에게로 거슬러 올라갈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상소문의 예를 보더라도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데 굉장히 용감하고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진중권스럽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매체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전방위적 발언을 하기는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요즘은 전방위적 발언을 실시간으로 출납하는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신문, 방송 등의 창구가 있지만 조선시대에 가장 큰 '매체'는 조정이었다.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져도 이 소식이 지방으로 내려가려면 길게는 수십 일, 짧아도 며칠이 걸렸다. 안 교수는 "요즘은 모든 문제가 분화돼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보편적 지식으로 해결하는 보편적 주제가 많았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진중권처럼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다산의 학문적 깊이와 폭을 떠올리면 된다. 다만, 매체의 한계로 인해 진중권처럼 살기에는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당시의 논쟁은 가까운 이들끼리의 대화나 편지를 통한 논쟁이 많았다. 특히 편지는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주요한 통로였다. 편지를 돌려보는 전통도 있었다. 지금처럼 하나의 트윗을 수만 명이 돌려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돌려보고 의견을 나누었다. 안 교수는 "정치인들 가운데 행동대장 격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정당 대변인처럼 앞에 나서서 여론을 주도하거나 당파의 의견을 절충·조정하는 역할을 맡는 이들이었다. 안 교수는 조선 숙종 때의 김춘택을 예로 들었다. 시문에 뛰어난 김춘택은 언제나 당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세 번 감옥에 갇히고 다섯 번 유배길을 떠났다.
전방위 논쟁 주도한 자유주의 지식인
한국 현대사로 시기를 끌어올리면 어떤 인물이 백과전서파 논객 열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간단치 않다. 전방위 논객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굳건히 진지전을 펼치는 이가 많았다. 논객이 논쟁을 이끌기보다 논쟁을 중심으로 논객이 만들어졌다. 1920년대 중반 벌어진 프로문학 논쟁에서 당대 문인들인 김기진·박영희·염상섭·이광수·양주동 등이 등의 지면을 빌려 설전을 벌였다. 1954년에는 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을 두고 서울법대 황산덕 교수가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공격해 '자유부인 논쟁'이 벌어졌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에는 또다시 문학에서의 순수·참여 논쟁이 벌어졌다. 평론가 이어령과 시인 김수영이 와 를 오가며 벌인 '불온시' 논쟁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는 변혁론과 사회구성체 논쟁을 두고 백가쟁명의 시대를 이뤘다. 대학생 이진경은 '사사방'()을 쓰며 논쟁의 아이콘이 됐다.
모든 전선에서 각개전투를 벌이는 전방위 논객의 시대는 1990년대부터 무르익기 시작했다. 논객이 논쟁을 주도하는, '본격 논객' 시대의 도래다. 언론인이자 경제학자인 고 정운영 전 논설위원이 정치·경제·사회·역사를 아우르는 경제 칼럼으로 날카로운 필명을 날렸다. 1990년대 말에는 지역주의·김대중·노무현·족벌언론·지식인·서울대·패거리주의를 이라는 1인 출판물로 '조져온' 강준만이 등장했다.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라는 고종석도 짙은 밀도의 먹물을 튀겼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없던 세상. 즉자적 반응보다는 자기 진영을 대표하는 계간지나 신문 지상, 단행본을 통해 호흡이 긴 논쟁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문화비평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학)는 "진중권 같은 논객이 있었다면 김수영 정도다"라고 했다. "패거리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문단을 비판했다. 강연하러 갔다가 강연록을 찢기도 하고 간간이 쌍욕을 하기도 했다." 눈 깊은 김수영이 전방위 논객의 반열에 올라간 이유다. 실제로 시인의 자유를 향한 정치성과 불온성은 도처에 드러난다. 산문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1966)에서는 "신문은 감히 월남 파병을 반대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은 질식 상태에 있고, 언론 자유는 이불 속에서도 활개를 못 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위험한 일은 지식층들의 피로다"라고 일갈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에 따르면 김수영의 이런 '태도'는 "60년대 한국 사회에 미만한 후진성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급진적 자유주의의 비타협적인 표명"으로 요약된다. 김명인은 그 예로 김수영의 여러 산문을 인용한다.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 언론 자유다. 1에도 언론 자유요, 2에도 언론 자유요, 3에도 언론 자유다"('창작 자유의 조건'),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인이 없다"('모기와 개미'), "비평적 지성을 사생아로 만드는 냉전"('생활의 극복'), "유상무상의 정치권력의 탄압"('지식인의 사회참여').
언론인이자 경제학자인 고 정운영 전 논설위원이 정치·경제·사회·역사를 아우르는 경제 칼럼으로 날카로운 필명을 날렸다. 1990년대 말에는 지역주의·김대중·노무현·족벌언론·지식인·서울대·패거리주의를 이라는 1인 출판물로 '조져온' 강준만이 등장했다.
짧은 산문을 날렸던 김수영의 추억
김수영이 불온하게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비판의 오지랖은 파병·노동운동·언론자유·지식인 사회를 모두 아우른다. 산문 '치유될 기세도 없이'(1960)에서는 "없는 사람이 잘살아보겠다고 하는 운동을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정부의 처사가 상식화되어가고 있는 사태처럼 요즈음 우리들을 다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경북 교조나 경방 파업 문제 같은 것만 하더라도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빨갱이'에 대하는 태도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썼다. 김명인이 2008년 발굴한 김수영의 미발표 시 '김일성 만세'(1960)는 이념적 금기어인 '김일성'까지 뿜어낸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듬해에는 "나는 이북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불온서적 운운의 옹졸한 문화정책을 지양하고 명실공히 리버럴리즘을 실천해야 하며…"('시의 뉴 프런티어')라고 썼다. 자신이 몸담은 문단은 물론, 날 선 이념의 금기들마저 활자로 찍어내며 추문으로 만들어버렸다.
1960년대의 김수영에게는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트위터는 없었다. 대신 이승만의 자유당과 짧은 4·19와 박정희의 5·16이 있었다. 마땅히 펜을 들어야 할 시대였다. 짧은 산문들은 시대에 날리는 트윗이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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