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읽지 못하는 완고함이 게으름의 한 형태라면, 아무 데서나 변화를 읽어내는 과민함도 게으름의 한 형태다. 둘 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속 편한 환상으로 도피한다. 지금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큰 힘은 지역주의다. 10년 전, 20년 전에 그랬듯. 최근 부산 경남(PK)의 지역주의 해체를 운위하는 이들도 있으나, 망상이다. 영남 지역주의에서 피케이 소지역주의로의 이행이라면 또 모르겠다.
이 지역주의에 패기 있게 맞서 그것을 허물려 한 정치인이 노무현이다. 그의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한국인들의 고향 애착이 워낙 검질겨 그랬겠지만, 거기엔 노무현 자신의 조급하고 볼품없는 정치공학도 한몫했다. 노무현에게 호의를 보였다가 지지를 거둬들인 이들은 흔히 그의 '계급 배반'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서 더 두드러진 것은 '지역 배반'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계급모순과 지역모순은 맞물려 있다. 영남을 향한 노무현의 헛된 구애는 예컨대 그가 삼성 재벌에 끊임없이 보낸 추파와 살며시 겹쳤다.
참여정부 아래서 호남이 영남에 견줘 '물리적으로' 차별받은 바는 없다. 그러나 노무현은 덜 여문 언행으로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호남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나를 찍은 것이 아니라 이회창씨가 싫어서 나를 찍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가장 진지한 지지자들에 대해 예의를 저버린 짓이었다. 설령 호남 유권자들의 심리에 그런 요소가 설핏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회창씨'가 싫어서라기보다 '한나라당 후보'가 싫어서, 한나라당이 집권할까 두려워, 노무현에게 몰표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무현이 "호남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나를 찍은 것이 아니라 내가 민주당 후보여서 나를 찍었다"고 말했다면 한결 나았을 것이다. 노무현이 원래 말하고자 했던 바가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호남 유권자들은, 노무현의 사람됨이 이회창씨의 사람됨보다 훨씬 낫다는 판단도 했겠지만(나도 그리 판단한 전라도 사람이다), 일차적으로 그가 민주당 후보여서 그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가 민주당 후보가 아니었다면, 호남 유권자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이상이 왜 그에게 표를 주었겠는가? 한나라당 지지자들로부터 '지역주의자'라는 조롱을 받아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니까 민주당이 '호남당'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옳다. 민주당, 호남당 맞다. 더 넓혀도 대한민국 서부 지역에 뿌리내린 '서부당', 맞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당원들이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 호남당 후보로 대통령이 된 이가 주변의 야심가들과 함께 그 당을 깬 것도 모자라 한나라당과 연정을 꾀했을 때, 호남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내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꾀하고 있는 세력들은 호남 유권자들을 제 호주머니 속의 유리알로 여기고, 피케이 유권자들과 이른바 시민사회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위태로운 전략이다. 물론 민주당과 호남(출신) 유권자들만으로는 정권을 되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 호남 없이는 정권 교체 꿈도 못 꾼다. 지금 추세가 이어진다면, 내년 대선에선 한나라당 후보와 피케이 출신 후보 누군가가 맞설 듯하다. 그런데 '노무현의 배신'을 기억하고 있는 호남 유권자들이, 비록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하지는 않을지라도 대거 기권한다면, 정권 교체는 물건너간다.
그 피케이 출신의 잠재적 대선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인 문재인씨는 노무현 못지않게 매력적인 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정권 시절 "노무현 정권은 '부산 정권'"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부산에서의 따돌림이 오죽 서운하고 갑갑했으면 그랬을까 이해되는 바도 있지만, 그것은 정권 창출의 주춧돌이었던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을 도려내는 말이었다. 호남 유권자들의 긍지는 '개혁적 정권'을 다시 만들었다는 데 있었지, '부산 정권'을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문재인씨든 또 다른 피케이 출신 정치인이든, 호남(출신) 유권자들(그들 대다수는 민주당 지지자일 테다)의 '지역주의적' 몰표 없이는 청와대에 입주할 수 없다. 정권 바꾸고 싶으면, 신실한 지지자들을 신실하게 대하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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