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4

[지지대] 봉변당하면 부쩍 크는 유시민

[지지대] 봉변당하면 부쩍 크는 유시민
2012년 05월 15일 (화) 김종구 논설실장 kimjg@ekgib.com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 4분.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연합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선다. 11시 5분, 박관용 의장이 경호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단상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한나라당 의원들이 단상에 올라섰고 국회경비들이 진입했다. 한명숙 의원이 들려나가고, 임채정 의원이 끌려나가고…. 11시 22분 대통령 탄핵안은 가결됐다. 국회 로비에 내동댕이 처진 유시민 의원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허리띠는 끊어졌고 속옷이 삐져나와 있었다. ▶시

사프로그램에 출연한 유시민의 입이 불을 뿜었다. "욕 들어가면서 4년 국회의원 하고 두 달 남은 의원들이 4년 남은 대통령을 쫓아낸다는 건 총 칼 없는 쿠데타입니다. 이재오 의원께서는 '이대로 가면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진다. 탄핵안 반드시 가결시켜야 한다'고 하셨고, 최병렬 대표께서는 '탄핵안이 가결되면 국민의 뜻을 모아 대통령 선거를 할지 개헌을 할지가 결정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권력찬탈 음모입니다.". 유시민의 독설은 탄핵 역풍의 논리가 됐고 그의 큰 정치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8년이 흐른 2012년 5월 12일 오후 9시 41분 킨텍스 회의장. 통합진보당 심상정 대표가 "강령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선언했다. 그 순간 100여 명이 단상으로 난입했다. 당권파 당원과 대학생들이었다. 조준호 공동대표는 머리채를 잡힌 채 얻어맞고 옷이 찢어졌다. 심 대표는 구둣발에 짓밟혔고, 이를 말리던 유 대표도 여러 차례 얻어맞고 안경까지 날아갔다. 9시 45분, 현장을 빠져나가는 유 대표의 모습은 8년 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틀 뒤인 14일. 역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한 유시민의 입이 다시 불을 뿜었다. "(당권파들이) 매우 잘 준비하고 현장에서 아주 조직적으로 지휘해서 폭력사태를 일으켰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석기 당선자는 국회에 보내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임기가 시작될 때까지 당의 모든 의사결정기관의 의사결정을 다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당원들의 주장처럼)악착같이 이 당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생각입니다". 8년 만에 다시 보는 데자뷰다. 봉변당할 때마다 불을 뿜는 유시민의 입. 그 입이 또다시 폭력 정국 뒤의 주도권을 틀어쥐는 쪽으로 가는 듯하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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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8

'인간 이순신' 연구 40년 헌법재판소 김종대 판사

[Why] [김윤덕의 사람人] '인간 이순신' 연구 40년 헌법재판소 김종대 판사

 

입력 : 2012.04.27 14:12

둔재에 왕따… 청년 이순신은 '거북이'였다

오늘 충무공 탄신 467주년 -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맹장(猛將)으로 묘사한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다. / 조선일보DB

37년간 '성웅(聖雄)'이순신과 함께 살았다. 그냥 이순신이 좋았고 그래서 이순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1975년 공군 법무관 시절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이은상의 책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부터다. "초임 판사 때 출장비 2만원 중 몇천원이 남아 총무팀에 돌려준 것도 이순신처럼 청렴한 공직자가 되고 싶어서였는데 총무과장에게 되레 혼만 났다"며 64세의 베테랑 재판관은 아이처럼 웃었다.

헌법재판소 김종대(64) 수석재판관이 일생의 업으로 여기고 매진했던 이순신 연구를 세상에 내놨다. '이순신, 신(臣)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시루)는 충무공의 생애와 리더십을 집대성한 그의 역작이다. 2002년 첫 책을 출간한 뒤 세 차례 개정하고 증보했다. 그는 "짧고 좁은 안목으로 성웅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충무공 탄신 467주년을 닷새 앞둔 23일,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그를 만났다. 김 재판관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 물질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로 병든 대한민국을 치료할 약재는 충무공 정신밖에 없다"고 했다. 12월 대선에 관해서도 "진정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법고시 동기이자 '8인회' 멤버로, 노 대통령에게 이순신 리더십에 대한 영감을 심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국민을 사랑한 대통령이었으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자리한‘충무공 이야기’전시관은‘이순신맨’인 김종대 재판관이 강연차 종종 찾는 곳이다. 그는“거북선의 우수성, 뛰어난 전략전술보다 위대했던 것은 이순신의 인격이었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늦깎이 사회생활 -33세에 武科 재수로 합격… 그나마도 중간 이하 성적
밤낮 상사들에 직언하다 40대, 종6품 겨우 오른 분

병든 사회, 이순신이 名藥 -
맡은 일 목숨걸고 전심전력, 결과는 괘념치 않는 초연함 '충무공 정신' 주사 만들어 공직자들에 놔주고 싶다

이순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책 제목이 독특합니다.

"헌재 후배 판사들이 정해줬어요. 이순신 장군이 출전을 앞두고 임금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였지요.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 중 하나지요. 새 지도자 선출을 앞둔 올해 꼭 필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하면 식상한 느낌이 듭니다.

"김 기자는 이순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국민의 70%가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지만 그에 대해 말해보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나도 '거북선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영웅'이라고만 알았지요. 한데 이은상의 책을 보니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100의 1도 안 됩디다. 아,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어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그때 든 상사병이 지금까지 온 겁니다.(웃음)"

―어디에 감동을 받으셨나요?

"전혀 몰랐던 일화들 때문이죠. 초급장교 이순신을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유성룡이 권합니다.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인 이이를 한번 만나보라고. 이이는 병조판서를 지냈으니까요. 이순신은 고개를 젓습니다. 인사문제로 집안 어른을 만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죠. 이건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정언신이라는 정승이 '정여립의 난'에 연루돼 감옥에 갇혔는데 당시 전라도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이 그 소식을 듣고 당장 면회를 갑니다. 자칫 본인의 신상에 위험이 닥칠 수 있는데도 이순신은 기어코 찾아가지요. 아, 이 사람 지독히 올곧으면서도 의리가 있는 사람이구나, 융통성 없고 기이한 사람이구나 싶데요. 성웅이기 전에 인격자로 보였습니다."

―어떤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셨나요? 우리 사회에 프로·아마 이순신 전문가들이 많은데요.

"나는 학익진 전법이 뭔지 자세히 모릅니다.(웃음) 나는 다만 이순신의 내면세계를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걸 위해서는 충무공전서,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 몇 가지 사료만으로 충분했지요. 나의 지력(智力)을 탓해도 자료를 탓할 순 없습니다."

이순신은 관료사회 부적응자였다

―왜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십니까.

"동료 재판관이 똑같은 질문을 하데요. 무슨 사료가 바뀌었길래 다시 책을 고쳐 쓰느냐고. 법(法) 하는 사람들은 법이 개정돼야 새 책을 내지 않습니까.(웃음) 그때 다른 동료가 나를 두둔합디다. 시인이 똑같은 대상을 두고 시를 한번 읊었다고 해서 두 번 다시 그 대상을 두고 읊지 말라는 법 있느냐면서요. 돌아보니 이순신에 대한 나의 관심은 참공직자의 사표에서 성공하는 리더의 모델로, 그리고 '인격자' 이순신으로 옮겨갔더군요. 이순신 리더십의 본질은 그의 인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순신은 무관에 뜻을 품었던 22세부터 미관말직에 나아가는 32세에 이르는 동안 치열한 자기 수양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비 같은 장군'의 풍모를 보여주는 영정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은 논어, 중용 등을 읽으며 정신 수양에 열성을 다하지요."

―책에 보니 이순신 장군은 천재도 아니었고, 관료사회에도 적응하지 못한 공직자였더군요.

“28세 때 처음 응시한 무관시험에 떨어지고 32세에 합격합니다. 그것도 중간 이하의 성적으로요. 조직 적응 능력도 상당히 떨어졌지요. 유성룡 같은 이가 오죽하면 이순신은 밀고 당겨주는 이가 없어서 출세가 늦었다고 했을까요. 남들 뒷방노인 될 나이인 40대에 정읍현감(종6품)에 겨우 오릅니다. 밤낮 상사들한테 직언을 해대는데 누가 밀어주겠어요? 고흥 발포만호성에서 근무하던 시절 상관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만호영 뜰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니 ‘공물을 사사로이 처분할 수 없다’며 이를 막아섭니다. 훈련원에서 봉사직으로 있을 때는 직속상관 서익의 인사가 법과 원칙에 어긋난다며 이의를 제기하지요. 그날의 앙심으로 나중에 서익이 이순신을 파면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종6품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발탁됐을까요?

“나라가 급하니까, 전쟁상황이니까요. 유성룡은 이순신을 너무나 잘 알았어요. 저건 장재(將材)다 하고 선조에게 적극 추천했지요. 나는 이순신의 이런 면모가 요즘 청년세대에 위로와 희망을 준다고 생각해요. 취직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이순신으로 치면 33세에 직장을 구한 셈이지요. 출발이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들어가서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바르게 자기 책임을 완성하느냐는 거지요.”

이순신 리더십의 원천은 그의 어머니

―새롭게 고친 부분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그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 모친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순신이 극진한 효자였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전쟁 중 다른 가족은 다 아산에 두고도 어머니만은 자신의 진지 옆에 모셔와 언제나 문안을 드린 효자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거북선 만들던 여수 진남을 답사해보니 그게 아니에요. 어머니 계시던 곳은 배 만들던 선소에서 4㎞, 본부에서는 9㎞나 떨어진 곳으로 매일 아침 이순신 장군이 문안을 드리러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지요. 문안이 아니라면 왜 이순신은 그 위험천만한 최전방에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데요. 내가 내린 답은 전방에 와 있겠다고 한 건 어머니 자신이었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왜 전쟁터로 오셨을까요.

“이순신은 서울 사람입니다. 명보극장 있는 마른내(근천동)에서 태어났죠. 그런데 집안이 가난하니 어머니가 친정인 충남 아산으로 식솔을 모두 끌고 내려갑니다. 강한 여인이었죠. 이순신은 그런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표현할 만큼 따르고 존경했는데, 아들의 그런 성품을 잘 아는 어머니가 전쟁 중에도 자식이 나랏일을 실수없이 하도록 스스로 전쟁터로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순신 일대기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더군요. 그중에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 자살설도 있습니다.

“‘불멸’의 한 방법으로 자살을 택했다더군요. 소설이라고는 해도 그건 이순신의 인생을 완전히 왜곡하는 겁니다. 이순신에게 왜적은 불의와 탐욕의 집단이자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는 범죄집단이었어요.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적은 보복 차원에서 아산에 있는 장군의 막내아들을 죽입니다. 이순신으로서는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죽기 전날 이순신은 ‘이 탐욕의 무리를 다 죽이고 내가 죽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기도를 합니다. 자살할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하겠습니까?”

―정유년 초 왕명을 어긴 죄로 투옥되었다 풀려나 백의종군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기까지의 기간을 이순신 생애의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순신 인격의 정점을 보여주는 시기죠. 자신에게 사형까지 명했던 왕이 다시 초토화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하는데, 나 같으면 그 명령 안 받습니다. (웃음) 거느릴 군사와 배와 총포도 없는 상황에서 그건 죽으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순신은 받아들입니다. 이순신의 눈에는 자신이 지켜야 할 국토와 백성만 있지, 정치권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12척의 배와 찌꺼기 병력으로 400척의 왜적을 무찌르는 명량대첩을 이뤄냅니다. 연구자들은 판옥선의 우수성, 학인진 전법 같은 것을 승리요인으로 얘기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도망쳤던 병사들이 ‘이순신이 왔으니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여든 것, 장수와 병사들 간의 굳은 신뢰와 소통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 거죠.”

―이순신은 약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나도 그 약점을 찾아서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요.(웃음) 이순신이 장수답지 않게 감성적이고 과장적인 표현을 즐겨 쓴다는 것밖엔 없더군요. 위로 두 형이 죽어 장자 역할을 했던 이순신이 조카들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하는 대목을 보면 이 사람이 장수가 맞나 할 만큼 연약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비난할 일도 아니지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있는 허물을 감추는 것도 안 되지만 없는 허물을 들춰내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게 나의 변명입니다.”

어진 선비의 풍모로 묘사된 이순신 영정. 김종대 재판관은“12월 대선에서는 이순신처럼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도자가 뽑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친구였던 노무현 前대통령 - 부정과 불의에 대한 분노, 구국으로 발전시키지 못해
이순신처럼 국민 아꼈지만 자기와의 싸움에서 졌다

막말 판사들에게 고함 -
양심 위에 법률 있고 법률 위에 헌법 있는데
개인 양심으로 法을 깬다?… 그럼 법복 벗어야지

강자의 약자 억압엔 철퇴 - 여성·어린이·장애인 해코지 합의됐다 해도 실형 선고
힘없는 국민 압박해 저지른 공무원 부정도 중대 범죄다

이순신처럼 살고싶다 - 초임 시절 출장비 2만원 중 몇천원 돌려줬다 혼나기도
이순신 팬들 많아지면 대한민국 훨씬 건강해질 것

삼성자동차, 그리고 지율 스님

경남 창녕 출신의 김종대 재판관은 1979년 부산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2006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기까지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향판(鄕判)’이다. 법조계에서는 ‘조정의 달인’으로 통한다. 삼성자동차 조정 사건은 유명하다. 파산 위기의 삼성자동차를 기사회생시켜 부산 경제는 물론 국가 경제의 손실을 최소화했다. 공직자 비리와 여성·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죄는 엄벌하는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범죄를 가장 경멸한다”고 말했다.

―삼성자동차 사건으로 ‘조정의 달인’이란 별명을 얻으셨지요.

“삼성자동차가 르노에 인수되지 않으면 파산하게 돼 있는 상황이었어요. 르노는 5500억원 이상은 안 주겠다고 하고, 르노가 삼성을 인수하면 국부 유출이라는 비난도 있었고요. 문제는 삼성자동차가 파산하면 대한민국 경제가 5년간 20조원의 적자를 본다는 사실이었어요. 당장 1만명의 종업원이 쫓겨나고 지역경제가 파탄납니다. 그래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채권자인 삼성물산과 은행권을 설득했지요. 당신들이 손해를 보고 국가를 살리자 했습니다. 채권단의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내가 이 일로 옷을 벗어도 좋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천성산 도롱뇽 사건의 항소심 재판장도 맡으셨었지요?

“아쉽게도 조정에 실패한 사건입니다. 나는 천성산 터널 문제가 서울 사패산 터널처럼 국가와 환경단체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서 잘 해결되기를 바랐어요. 타협이 되자 터널 공사할 때 스님들이 나와 목탁도 두드려주셨으니까요.(웃음). 그런데 천성산은 안 됐어요. 터널을 뚫었을 때 생태계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입증하는 실험을 해보자는 중재안을 갖고 계속 설득했는데 말을 안 듣더군요. 더 이상 기다렸다간 나라 꼴이 엉망이 되니 공사를 재개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지요.”

―그 판결을 주제로 어느 월간지와 인터뷰를 하셨다가 지율 스님으로부터 ‘소송과정을 왜곡하고 사실을 호도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받게 됩니다. 1심, 2심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이 났습니다만.

“많이 반성했습니다. 모두 내 인격 탓이지요. 나는 지율 스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자기 욕심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어서 좋더군요. 충분히 타협해서 지혜롭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이 그렇게 어그러져 아쉬울 뿐입니다. 천성산 물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더더욱…. 나는 일도양단의 명판결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능하면 양쪽이 조금씩 양보해서 중도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의의 가치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공직자 비리에 굉장히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범죄가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을 해코지하는 범죄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정하게 식품을 만들어 파는 사건은 설령 합의가 되었다 해도 실형을 선고합니다. 공무원의 부정도 그 공무원이 힘없는 국민을 압박해서 저지른 범행이라면 중대범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최근 사법부에 국민들의 비판적 관심이 급증했었지요.

“나도 영화 ‘부러진 화살’은 봤어요. 많은 법관이 왜 우리를 이렇게 묘사했느냐며 반발했지요. 하지만 변명 이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국민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는지 반성하고 오해를 사지 않을 방법을 이제부터라도 찾아나가는 게 중요하지요. 그래야 100가지 불만이 10가지로 줄어들고 우리 사법부도 발전합니다.”

―서기호 판사 등 일선 판사들의 정치적 발언과 막말이 비난을 받았습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양심보다 더 위에 있는 게 법률이고, 법률보다 더 위에 있는 게 헌법입니다. 내 개인적 양심으로 헌법도 깨고 법률도 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헌법을 모른다? 그럼 법복을 벗어야지요.”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

―다시 이순신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승만, 박정희, 노무현 등 역대 권력들이 이순신 리더십을 강조해왔습니다.

“권력자라면 누구나 이순신을 활용하고 싶을 겁니다. 정치인들이 이순신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학자들은 외려 이순신 교육을 회피할 정도지요. 권력에 아부한다는 오해를 살까봐.(웃음) 중요한 건 그 지도자가 진정 이순신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이순신을 좋아했고 그 길을 가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사이가 각별하셨지요. 노 대통령이 어느 날 이순신을 들고 나온 것도 재판관님 영향을 받은 걸까요?

“2002년 첫 책이 나왔을 때 읽어보라고 주긴 했는데 내 책은 안 읽고 ‘칼의 노래’만 읽은 것 같습니다.(웃음)”

―친구이기도 한 노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된 지도자였던 건 맞아요. ‘사람 사는 세상’을 구현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 마음이 바탕이 됐겠지요. 그런데 그 마음을 한 차원 승화시키진 못했어요. 부정과 불의에 분노하는 마음은 대단했으나 그걸 진정한 구국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지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게 아닌가 싶어요. 반대자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화합을 이루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자주 만나셨습니까.

“재임 시절 대여섯 장의 편지를 써서 건넨 적이 있어요.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니 마음에 안 드는 집단이 있다고 해도 다 안고 가야 한다’는 내용으로요. 받기는 받았는데 읽었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이순신 장군이 숱한 모함과 고초 속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했던 것은 자기를 통제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이길 힘을 기르지 못한 게 노무현의 가장 큰 패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 시대에 이순신 정신은 왜 필요합니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이념적으로는 남과 북, 물질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로 우리 사회는 병들어 있어요. 이걸 치료할 약재로 충무공 정신만 한 게 없습니다. 매사 원칙에 따라 정의의 외길을 간 것, 일을 당하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한 것, 결과에 괘념하지 않는 것, 선공후사(先公後私)에 철저했던 것 등등 할 수만 있다면 그 정신을 주사약으로든, 당의정으로든 만들어서 공급하고 싶어요.(웃음)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이순신을 제대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은행 총재 하셨던 이성태 선생이 그러시데요. 70이 다 된 지금도 이순신의 한마디가 머리에 박혀 있다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을 얻게 되면 나가 충성을 다하고 벼슬을 얻지 못하면 농사지으면 되지 헛되이 명예를 구해서 기웃거리는 것은 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일이 선고인데도 내가 만사를 젖혀놓고 인터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이순신 팬을 많이 만들고 싶어서, 그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훨씬 건강해질 겁니다. 이순신,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2012-04-21

고난주간 설교말씀, 이재철 목사님, 2012.04.04. 4월3일자.

의-

절제-

심판-
14296단어.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것은 평등.
그러나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다 다르다.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이시다.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왜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셨겠나.
마20장 달란트 비유처럼, 우리에게 주신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노력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

이신칭의.
성화.
하나님의 셈하심.

벨릭스는 심판에 대해 듣지 못했으니 놀랐다.
그러나 믿지는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이다.
이 어리석은 벨리스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토록 말씀 많이 듣지만... 그걸 내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

믿음의 진행은 역순임을 모르기에.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믿을 때 자기부인도 할 수 있고, 그럴 때 의...

시험을 의식하는 학생만 공부한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을 아는 학생만 열심히 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믿기 전에는 자기부인

고전7:1,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6:18- 우리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을 깨끗이 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가 아니다.

왜 두려워하나? 그 아버지는 심판의 하나님이시요, 내 삶의 결과에 따라 상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래서 심판을 믿음으로 자기부인의 거룩한 삶을 살자....

그 기준은 말씀.
그럴 때 의와 절제의 삶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교회가 욕먹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상은 이 땅이 아닌, 저
천국에서 주시는 것인데... 그걸 잊으니 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했다.

심판의,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려워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바울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해도 저 천국에서 상급을 받을 수 있기에...

그러나 그걸 믿지 않으면 이 세상 떠날 때 후회할 수밖에 없다.

이 고난주간이 새로운 행진하는 귀한 시간이 되자.

2012-04-02

[NEWS & VIEW] '민간사찰 정국' 반전, 그리고 혼전

지난 29일 KBS 새노조의 사찰 문건 폭로로 시작된 '사찰 정국'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국이 사찰 문제로 본격 요동을 치게 된 것은 지난 29일 저녁 파업 중인 KBS 새노조가 "총리실의 3년치 사찰 내부 문건 2619건을 단독 입수했다"며 보도자료를 돌린 게 계기다.
여야가 일제히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던 상황이 31일, 청와대 최금락 홍보수석이 민주통합당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가 폭로한 문건 2619건에 대해 "그중 80%가 넘는 2200여건은 현 정부가 아니라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총리로 재직하던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사찰 문건"이라고 말하면서 1차 반전이 이뤄졌다. 최 수석은 "이 정부에서 작성한 문건은 공직자 비리와 관련한 진정, 제보, 투서, 언론 보도 등을 토대로 조사한 400여건으로 대체로 제목과 개요 정도만 있고, 실제 문서 형태로 된 문건은 120건 정도"라고 했다.
그러자 1일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씨는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정부 때 것은 적법 절차를 따른 공직 감찰"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날 트위터에 "참여정부에선 불법 사찰 민간인 사찰, 상상도 못했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에 청와대는 물론 총리실까지 나서 "DJ·노무현 정권 때도 정치인·민간인을 사찰했다"면서 그 사례를 공개했다. 최금락 수석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조사심의관실(공직윤리지원관실의 전신)이 2003년엔 김영환 의원(당시 민주당)과 윤덕선 인천 농구협회장, 2004년엔 허성식 민주당 인권위원장, 2007년엔 전국전세버스운송사업연합회 김의협 회장 등 다수의 민간인 등을 사찰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최 수석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직원이 이명박 대통령(당시 서울시장) 주변 인물 131명을 불법 사찰해 작년 4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노무현 정부 때도 정부 내 사정기관에서 'BH(청와대) 하명사건'을 처리했다"며 "이 역시 정당한 사찰이었는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그러자 민주통합당은 최근 공개된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 1팀의 '사찰 문건'은 전체 민간인 사찰 규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며, 전체 7개 팀인 지원관실의 활동 내역이 모두 공개되면 실제 불법행위는 더 있을 수 있다고 맞섰다.
이같은 양 진영의 폭로전(暴露戰)에 대해 법조계의 한 원로는 "아무리 선거가 급하다지만 민정수석실·총리실 등의 정당한 활동까지 불법 사찰로 몰아붙이고, 명예훼손이 분명한 내사 대상자의 신분까지 까발린다면 국정 운영의 메커니즘까지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영호 前비서관 구속 영장
한편 '민간인 사찰'을 재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지난 31일 조사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에 대해 1일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원문기사: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2/2012040200133.html

2012-03-31

일본 ‘전자책 시장 키우기’ 나섰다

일본 정부가 전자책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출판업계와 손을 잡기로 했다. 출판업계가 추진하고 있는 전자책 제작과 유통망 확충에 정부가 출자한 펀드 등이 거액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29일 보도를 보면, 일본 정부가 90%의 지분을 가진 관-민 합동 펀드인 산업혁신기구는 내년 2월에 출판업계가 연합해 설립하는 출판디지털 기구에 150억엔을 투자한다. 출판디지털기구는 고단샤 등 3개 대형 출판사와 인쇄회사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는 회사로 100만권의 책을 전자책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산업혁신기구는 이 회사의 자본금 170억엔 가운데 90%를 출자해 최대주주가 될 예정이다. 일본 정부가 100% 출자한 정책금융기관인 일본정책투자은행은 미쓰이물산과 도시바, 엔이시 등과 함께 전자책 배신 서비스회사인 '북 라이브'와 자본제휴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 투자기구들의 이런 움직임은 전자책 시장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전자책 시장은 현재 연간 600억엔(약 8000억원) 규모인데, 2015년에는 2000억~3000억엔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미쓰이물산은 내다보고 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박근혜 대 문재인…사활건 '대선 전초전' 개막
현직 부장검사 회식자리서 여기자 2명 몸 더듬고 성추행
날 감시하는 누군가가 자막을 띄웠다
김윤옥 국립중앙박물관 만찬, 어떻게 봐야 하나?
'라면의 남성성' 과학분석으로 밝힌다?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경찰은 왜 속였나


'운동권' 학생이었던 1992년, 나는 직업적인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선택한 분야는 '인권 운동'이었다. 거칠게 표현해서 1970~80년대가 '노동운동'이 대세였다면 87년 6월 항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대세는 분명 '통일운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권 운동'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990년 3월,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동료의 억울한 의문사를 밝히고자 싸우던 중 겪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너무나 힘들고 무섭고 고통스러웠던 그때, 누구라도 좋으니 절박한 호소를 들어줄 누군가가 정말 그리웠다.

그러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영장이 발부된 1991년 3월, 수갑과 포승줄로 묶인 채 호송되는 버스 안에서 '직업적인 인권운동가'가 되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했다. 나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간절함이 이후 인권운동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되었다.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이란?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생 강경대(20)씨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학생회장 석방 요구 시위에 처음 참여한 새내기였던 강씨를 경찰이 쇠파이프로 때려죽였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이에 따른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과 시민들이 정권 퇴진을 요구했고 시위는 확산 일로를 거듭했다. 노태우 군사정권의 분명한 위기였다. 그러던 1991년 5월 8일 아침, 한 재야 활동가가 정권 퇴진 요구 유서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었다. 그런데 경찰·검찰·안기부(현 국정원) 등으로 구성된 소위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는 잇따른 분신 사건 배후에 이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분신 배후설'을 제기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건이 이른바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이었다. 당시 검찰은 김기설에게 유서를 대신 써 준 사람을 검거한다면서 여러 명을 거론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서 대필범으로 '정해진' 이가 김기설의 동료였던 강기훈씨였다.  그것은 진실과는 상관없었다. 정권의 위기 탈출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유서 대필범'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매일 매일 조중동이 써대니 처음엔 믿지 않던 국민도 이내 혼란으로 빠졌다. 진짠가? 아닌가? 마치 지금 천안함의 진실을 두고 벌어지는 현상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권운동가의 숙명은 '세상의 거짓'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 활동한 단체가 '유서대필사건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였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나는 그곳에서 간사로 일했다.

결론적으로 '유서대필 사건은 조작'이었다.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의 발표였다. 진실은 역시 단순했다. '유서는 김기설의 필체가 맞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기훈씨가 '유서 대필범'이라는 '거짓말'이 공식적인 거짓으로 밝혀지기까지 16년의 허망한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강씨는 3년 2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와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과 상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다시 한번 그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처럼 내가 해온 인권 운동은 '거짓과의 싸움'이었다. 대부분 경찰·검찰 등 국가 권력의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주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망사건이라든가 전남 완도 존속살인 여 무기수 사건이 그랬다.

또한, 서울 모 여고 재산관리인으로 일하다가 청부 살해된 이 역시 아픈 상처로 남아 있고 살인범으로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어떤 청년의 불행한 사건 역시 내가 관여한 사건 중 하나였다.

억울한 죽음, 신호수를 아시나요?



그 가운데 1994년 내가 두 번째 인권단체 활동가로 일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만난 분들의 사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처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벽면을 빼곡하게 채웠던 영정 사진 앞에서 나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던 야만적인 시대가 있었다. 박종철, 이한열, 김성수,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김귀정 등등등. 낯익은 이름과 얼굴들 속에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이는 낯선 이름 '신호수'씨였다. 사건 당시 23살(1963년생)이었던 신씨가 불행한 사건에 연루된 것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1986년이었다.

1986년 6월 11일, 신호수는 직장인 인천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에게 체포된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공안사건과 상관없는 그가 이같은 혐의로 체포된 이유는 자신의 자취방 장판 밑에 숨겨둔 북한 삐라 34장 때문이었다. 경위는 이랬다. 1985년 전남 장흥에서 방위 복무를 했던 신호수는 소집 해제 후 이사를 했다. 그런데 방 주인이 방바닥에 깔려있던 삐라를 발견했고 이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신호수는 왜 이처럼 많은 삐라를 보관했던 것일까? 조사 결과 이는 군 포상휴가를 받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신호수가 복무하던 부대에서는 상당량의 삐라를 가져오면 포상 휴가를 줘 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의 삐라 관련 의혹은 해소되었다. 하지만 신호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신호수의 사망이었다.

경찰에 연행된 지 8일이 지난 6월 19일, 신호수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고향인 여수 돌산읍 대미산의 한 동굴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반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호수의 사망 경위였다.

당시 경찰은 "신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끝을 묶은 후 동굴 천장 부근의 바위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경찰의 이러한 주장은 억지에 불과했다. 신호수의 사체를 처음 목격한 유아무개씨가 2001년 의문사위에 출석하여 진술한 내용이다.

"(사건 직후) 현장 검증에 참석하라고 하여 경찰들과 함께 동굴에 갔다. 그러면서 경찰이 나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이후 경찰들은 내가 목격한 것처럼 신호수의 자살 자세를 재현하고자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경찰의 뻔한 거짓말이 밝혀지기까지 23년 세월 흘러



그렇다면 경찰은 왜 신호수의 자살 경로를 재현하지 못했을까. 애초부터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주장처럼 신호수가 자살하려면 약 2.5미터나 되는 동굴의 천장까지 올라가 그 틈에 옷의 뭉치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제3의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또는 사다리 등 도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실패는 당연했다.

그런데 불가능은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신호수의 자세였다. 사체 발견 당시 신호수는 묘하게도 양팔과 몸통이 허리띠로 묶여 있었다. 그래서 가정한다면 신호수는 먼저 자신의 양팔과 몸통을 허리띠로 묶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의 키인 165cm보다 높은 250cm 위치에 형태상 접근이 불가능한 바위까지 올라가서 목을 매야 자살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2중, 3중으로 불가능한 조건이었으니 당시 경찰의 '이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살 입증에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고 그 의혹의 끝은 당연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을 향했다. 물론 경찰은 강력 부인했다. 특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 차아무개씨는 "확인해보니 포상 휴가를 위해 삐라를 모아둔 것으로 밝혀져 3시간 만에 훈방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차씨의 주장만 있을 뿐 석방된 신호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진실위 조사 과정에서 차씨의 주장과 배치되는 진술이 잇따랐다. 차씨와 같이 근무했던 그 당시 경찰관 4명의 진술이었다. 그들은 신호수가 연행된 후 적어도 3일 이상 서부경찰서에 있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즉, 3시간 만에 신호수를 석방했다는 차씨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거짓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한 이유가 삐라 신고를 받고 착수한 통상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달랐다.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하기 9개월 전부터 이른바 '장흥 공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이 사건을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놀랍게도 신호수의 혐의는 '간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호수에게 해명 몇 마디 듣고 경찰이 석방했다니 믿을 수 있을까.

이 뻔한 경찰의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지기까지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9년 11월 10일, 진실위는 "서부경찰서 수사관 차씨 등이 '장흥 공작'을 통해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자 이를 자살로 위장했던 것으로 판단한다"며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거짓과 싸우는 숙명, '인권운동가'

여기서 끝났어야 할 신호수의 불행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2011년 8월 29일, 진실위를 통해 밝혀진 결과를 가지고 신호수의 아버지 신정학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 구속으로 인한 신호수의 위자료 청구는 인정하나 경찰의 가혹행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진실위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의 거짓말에 대한민국 법원이 다시 한번 생명을 불어넣어 준 '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일흔이 넘은 아버지 신정학씨는 법정을 나와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인권운동가인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수에게 부당한 처우를 강요할 때마다 즐겨 동원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국가가 이같은 논리로 거짓말을 정당화하고 국민을 속인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가 그렇고 4대강 사업, 또한 김훈 중위 사건으로 대표되는 군 의문사를 비롯하여 남북 관계에서도 거짓말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요즘 '애매하면 북한측 소행'이라는 우스갯말이 세인들 속에 떠도는 것 아닐까. 

나는 인권운동가로서 이러한 거짓과 싸울 것이다. 이것이 인권운동가인 내가 가진 '올바른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에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으나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진실은 반드시 승리함을 나는 역사 속에서 확인했다. 그 길에서 많이 이들이 함께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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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도대체 뭔 짓을 한 건가?
'범죄조직' 청와대...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및 증거인멸 사건이 관계자의 연이은 폭로로 갈수록 파문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 사건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사찰을 자행하면서 시작되었고, 2010년 6월 21일 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고 같은 달 29일 MBC < PD수첩 >이 그 피해자 사례를 보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한마디로 말해, 암행어사 박문수가 탐관오리는 제쳐두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는 백성들을 색출해 인생을 망가뜨린 사건이다.

KBS의 새 노조가 만든 <리셋KBS뉴스9>이 30일 새벽 폭로한 바에 따르면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대단히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사찰 대상자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KBS 등 방송사 내부동향과 노조의 성향, 주요인물 평가까지 다루고 있어 정권 차원의 사찰을 통한 언론장악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만 놓고 봐도 이것은 국가기관이 주권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행위로서 대단히 심각한 위법사항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파문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번 사건의 실체가 민간인 사찰→사건 은폐 및 증거인멸→수사축소→회유 및 재판조율로 이어지는 이른바 '4단 콤보'의 권력형 국가범죄행위라는 것이고 둘째는 청와대와 검찰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전모는 총리실의 가장 말단에서 상부의 지시로 하드디스크를 직접 파기(디가우징)한 장진수 전 주무관이 재판과정에서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장진수씨의 증언과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각 단계별 핵심사항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관계자들의 의견다툼이 있다).

[1단계] 민간인 사찰

이 사건의 일차적인 핵심은 대체 누가 민간인 사찰을 기획하고 지시했나, 하는 점이다. 이른바 윗선 혹은 몸통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한 가지 방법은 총리실에서 모은 사찰자료가 어떤 라인으로 보고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지난 20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민간인 사찰 사건은 청와대나 민정수석실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공식적인 상부지휘라인은 민정수석실이다. 따라서 지원관실이 민정수석실 몰래 단독으로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을 자행했는지 혹은 그것을 민정수석실이 알고 있었는지가 관건이다.

이에 대해 <서울신문>은 지난해 1월 10일 보도('민간인사찰' 민정수석실 보고 확인)에서 "9일 서울신문이 단독 입수한 '정무위(국회) 제기 민간인 내사 의혹 해명' 문건에 따르면 지원관실은 김 전 대표(김종익) 사찰 결과를 동향보고 형식의 문서로 작성해 2008년 9월 민정수석실에 보고했다. A4 용지 13장 분량으로 된 이 문건은 ▲착수 배경 ▲사건 개요 ▲진행 경과 ▲쟁점사안 등 4개 항목으로 돼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적어도 민정수석실(당시 수석비서관은 정동기 현 법무법인 바른 고문)은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사실을 (지휘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 자체도 위법한 행위다.

<서울신문>은 같은 기사에서 "또 권재진 민정수석(현 법무장관) 때는 검찰이 김 전 대표의 사법처리와 관련해 민정수석실을 통해 지원관실의 의견을 구했고, 지원관실은 민정수석실을 통해 검찰에 기소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는데 이로 미루어 민정수석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민간인 사찰에 개입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2단계] 사건의 은폐 및 증거인멸

장진수 전 주무관의 폭로와 이영호 비서관이 기자회견 때 한 자백 등을 종합하면, 적어도 이영호(혹은 그 윗선)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인 최종석을 통해 장진수로 하여금 하드디스크를 영구파기하도록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영호의 대포폰이 최종석을 통해 장진수에게 전달되었다.

이와 함께 장진수의 증거인멸은 "검찰에서 문제 안 삼기로 민정수석실에서 얘기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때에 즈음하여 진경락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한 김종익 비리혐의 문건이 최종석을 통해 당시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에게 전달되었고, 조전혁 의원은 이를 국회에서 폭로하여 여론반전을 꾀했다.

[3단계] 수사축소



장진수 전 주무관에 따르면 최종석 행정관은 검찰의 총리실 압수수색 날짜를 미리 알고 있었고 검찰은 서류나 특히 이영호 관련 자료도 챙기지 않았다. 텅 빈 압수물 박스는 신문지로 채우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신문>이 입수해서 보도한 지원관실의 문건은 검찰이 이미 확보한 문건으로써, 사찰의 윗선을 밝히지 못한 검찰의 수사는 의도적으로 축소된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한다.

그리고 '2단계'에서 이미 밝힌 대로 검찰은 처음부터 하드디스크 파기를 문제 삼지 않기로 민정수석과 얘기가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검찰은 대포폰의 존재는 물론 통화내역도 알고 있었고 최종석의 존재도 알고 있었으나, 장진수 전 주무관에 의하면 자신을 수사한 검사는 대포폰 관련 신문조서를 법원에 제출하지도 않았다(그러나 약속과 달리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는 증거인멸의 책임이 지워졌다).

검찰의 수사는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동기, 사찰 및 증거인멸의 윗선 등 이 사건의 핵심쟁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총리실 직원 일곱 명을 구속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4단계] 회유 및 재판조율

장진수 전 주무관에 따르면 민정수석실에서 이번 사건으로 재판받고 있는 7명을 특별관리 했다. 법무법인 바른(사찰 당시의 민정수석이 이곳 고문)의 변호사들은 이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고 장진수에게 진실 은폐를 종용하였다. 청와대는 재판 과정 전체를 모니터링(주심판사와 배석판사의 의견 차이까지 인지) 하고 있었으며 형량에 대한 조율(벌금형이 가능하다는 식으로)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장진수 전 주무관의 소송비용까지 대 주었다. 최종석 행정관은 "평생 먹여 살리겠다", "캐시로 당겨 주겠다"는 식의 회유를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끊임없이 시도했다. 실제로 2011년 4월 청와대 장석명 공직기강 비서관이 총리실 류충렬 국장을 통해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5천만 원이, 8월에는 이영호 쪽에서 2천만 원이 전달되었다.

이 밖에도 장진수 전 주무관의 아내 일자리 알선(총리실 류충렬 국장, 진경락 전 과장의 후임자), 장진수 전 주무관 본인의 일자리 알선(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장석명→청와대 인사행정관→가스안전공사 사장→가스안전공사 안전관리이사 채충근→경동나비엔 사장→경동나비엔 인사팀장 : 2012년 2월)도 있었다.

요컨대 형량조절, 소송비용 조달, 재판 모니터링, 금품제공, 직장 알선, 그 외 회유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청와대가 장진수를 '케어'했음을 알 수 있다.

민간인사찰, 대한민국 자체를 공격한 반국가적 범죄



위의 '4단 콤보' 범죄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청와대의 민정수석실과 사회정책수석실이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에 구속자들에게 금일봉을 건넨 임태희 대통령실장까지 보태면 청와대의 핵심라인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구가 아니라 조직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른 '범죄조직'을 구성한 셈이다.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으나, 이 범죄조직의 '행동대장'은 바로 범죄를 소탕할 책임을 맡은 검찰이었다. 현 정권과 관련된 큰 소송을 도맡아 온 법률법인 바른은 역시나 이번에도 법정에서 충실한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했다.

청와대와 검찰을 아우르는 '권력형 국가범죄조직'이 구성되어 국민을 핍박하고 증거를 인멸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주요 국가기능이 무력화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민간인 사찰 사건은 MB 정권 하의 다른 어느 사안과도 구별되는, 대단히 중대하고 심각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대통령 일가의 내곡동 사건이 권력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탐했던 범죄에 '불과'하다면, 민간인 사찰 사건은 주요 국가기관을 졸지에 범죄조직으로 둔갑시켜 주권자를 공격하고 증거를 인멸한, 말하자면 대한민국 자체를 공격한 반국가적 범죄사건이다(집권당이 선거관리위원회를 테러한 이른바 10·26 부정선거 의혹사건도 성격상 이와 비슷하나, 아직 그 사건의 전말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 역시 검찰은 윗선을 밝히지 못했다). 특히 그 범죄행위가 4단계에 걸쳐 대단히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무릇 모든 범죄조직에는 그 수괴가 있는 법이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권력형 국가범죄조직 사건의 수괴는 누구일까? 일단 검찰의 재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검찰은 이 범죄조직의 행동대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실제로 사건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권재진 전 민정수석이 지금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장관의 자리에 있으니, 재수사에서 새로운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 몰랐더라도 사과해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복수의 수석비서관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수괴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수석비서관 이상의 선에 진짜 몸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본인들은 부정하고 있지만, 항간에는 박영준 '왕 차관'과 그 뒤의 이상득 의원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 핵심라인이 망라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전혀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장진수 전 주무관은 자신과 관련된 문제가 'VIP'에게 보고되었다고 들었다는 진술을 한 바 있다.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지극히 상식에 부합한다. 대통령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사후에 소극적으로 추인하는 형식 정도는 거치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 그 막강한 권력라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만약에 대통령이 몰랐다면 그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둘 이상의 수석비서실이 연루되어 검찰까지 끼고 그렇게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도 대통령이 몰랐다면, 이는 환관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국정을 농락하다가 곧 멸망해 버린 고대 중국 어느 나라의 꼴과 다르지 않다. 나는 적어도 대한민국이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지는데 청와대는 여전히 침묵으로 혹은 단답형 오리발로 일관하고 있으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국가의 핵심권력기관에 의해 인생을 망친 한 국민에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명백하게 사실로 밝혀진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과 그에 따른 피해사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명박 대통령이 떳떳하고 청와대가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은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항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야 한다. 대통령이 정말로 '국민의 머슴'이라면 이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청와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국민들 사이에서는 '혹시 대통령이 정말로 이 범죄조직의 수괴인 것은 아닐까?' 하는 불순한 의혹만 커져갈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에 진심으로 바란다. 검찰의 공정한 재수사를 위해 최소한 권재진 현 법무장관은 해임해야 한다. 그것이 사건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성의다. 그와 함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국민들에게 재발방지를 약속하라. 그리고 자신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공개하라.

박근혜는 왜 이번 사건에 대응하지 않는가

사찰 대상에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도 포함돼 있었다는데, 박 위원장이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평소 법과 원칙을 강조해온 그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근혜 위원장과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행여 이번 사건이 'MB 심판론'과 연결돼서 총선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나 않을까 하는 선거공학적인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국기를 뒤흔든 사건이다. 박근혜 위원장이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보다 박근혜 위원장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을 위한 치밀한 이해타산이 앞섰기 때문이라는 비판을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장진수 전 주무관은 지금 어려운 싸움을 혼자 벌이고 있다. 추한 권력의 거악에 맞선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녹음파일과 기억의 조각들, 그리고 정의와 진실을 갈망하는 국민에 대한 믿음뿐이다. 지금 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을 공익제보자들은 이번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장진수 전 주무관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해서 범죄자들을 발본색원하고 합당한 처벌을 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와 진실이 결국은 이긴다는 사례를 만들지 못한다면 다시는 장진수 전 주무관 같은 공익제보자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렇게 넘겨서는 안 된다. 항상은 아니지만 어쩌다 가끔 한 번은 정의가 이길 때가 있다면, 지금이 그 '어쩌다 한 번', 가끔은 정의가 승리하는 그 '어쩌다 한 번'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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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이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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